또 그 속삭임이다. 정모(45)씨 귓가에 들리는 환청. 정씨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에 이끌려, 어느새 싸우는 남녀 곁에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본다. 그러면 열받은 남성이 "재밌냐"고 소리치며 시비를 건다. 결국 몸싸움이 벌어지고, 정신을 차리면 이미 파출소다.
정씨는 조현병 치료를 받고 있다. 조현병이 도지면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주요 증상은 환청, 망상, 이상 행동, 횡설수설. 내가 내 자신이 아니다. "생각이 내 몸을 조종해 시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생각에 사로잡히면 행동으로 이어지죠." 정씨가 말하는 조현병 증상이다.
최근 조현병이나 조현성 성격장애 등으로 치료받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이상동기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가 들고나온 카드는 사법입원제. 정신질환자를 법관의 결정으로 입원시키는 제도다.
그러나 조현병 치료를 받는 이들은 다 정신병동에 가둬둬야 할 '예비 범죄자'들일까. 조현병에 대한 불안과 관심은 커지지만, △이게 과연 어떤 병인지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범죄와의 연관성은 얼마나 높은 것인지 △과연 제대로 관리하면 일상생활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병인지는 제대로 잘 알려지 있지 않다.
무작정 이들의 범죄 위험성을 강조해 불안감만 높일 게 아니라, 병의 특성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관리하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일보는 실제 조현병을 경험하고 있는 환자들과 이들의 가족·의료진 등을 만나, 환청과 망상이 인간 영혼을 잠식하는 이 질환에 관한 '편견과 진실'을 추적했다.
지난달 31일 만난 조현병 환자 정씨의 하루는 여느 일반인처럼 이른 아침에 시작한다. 남들은 직장으로 출근하지만, 그는 항상 오전 7시쯤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서울 광진구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로 향한다. 센터 내 카페에 매일같이 나온지도 5년이 넘었다. 정씨는 병원에서 친해진 환우들을 여기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장난을 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취미생활도 즐긴다. 카페 다음 일정은 센터 인근 피트니스 클럽에서 시작된다. 운동이 취미인 정씨에게 하루 한 시간 운동 시간은 삶의 낙이다. 운동을 마치면 집 근처 코인노래방을 찾아 노래를 부르고 귀가한다. 오후엔 집에선 유튜브를 통해 운동 팁이나 조현병 정보를 찾아본다. 음악과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정씨가 조현병 발병 초기부터 이렇게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지는 않았다. 그는 조현병 탓에 시비와 폭행 사건을 달고 사는 '문제적 청춘'이었다. 전조증상은 고등학교 때 시작됐다. 외모 콤플렉스가 있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욕한다'고 생각해 점점 수그러들었고 외톨이가 됐다.
조현병의 대표 증상이라 할 수 있는 '망상'과 '환청'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는 걸까? 정씨에 따르면 환청은 △남자 목소리 △아기 목소리 △여자 귀신 목소리 등 다양한 형태로 속삭이듯 찾아온다고 한다. 현실과는 다른 생각이나 신념을 고집하는 망상(delusion)도 대부분 환청과 함께 찾아온다고 한다. 대표적 망상인 피해망상이 찾아오면,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욕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정씨는 "망상이 오면 뇌와 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고 그 순간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며 "특히 스트레스를 받을 때 증상들이 쉽게 발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과연 조현병은 어떤 병이기에, 이토록 인간의 정신을 망상과 환청으로 지배하는 것일까? 조현병은 100명 당 1명 꼴로 발병하는 정신질환으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뇌질환이다. 과거엔 '심리적 문제'로 봤지만, 최근엔 '생화학적인 뇌의 이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고 한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조현병은 뇌가 가장 취약한 시기인 10대 후반에 가장 많이 발병하고 재발을 잘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중증 정신질환자는 약 65만명인데, 이 중 조현병과 분열형 및 망상 장애 환자는 18만2,901명(28.1%)에 달한다.
치료는 크게 약물치료와 정신치료(상담·집단치료 등)로 나뉘는데, 특히 꾸준한 약물치료가 중요하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조현병 환자들은 병이 나았다고 자체 판단해 약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약물 복용이 중단되면 약물 순응도가 떨어져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돌발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준수 교수도 "첫 발병 후 적어도 5년 이상은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며 "그리고 나서 약을 줄일지를 지켜봐야 한다"고 권고했다.
정씨도 약물 치료의 적기를 놓친 케이스에 속한다. 조현병 초기에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 4년간 10번 가까이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약을 먹으면 몸이 딱딱해지며 무기력한 기분이 들고, 스스로 약을 먹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 생각해 복용을 중단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돌발 행동이 반복되자 30세 무렵부터 약의 중요성을 깨닫고 꾸준히 복용을 시작했다. 아직 망상 증세가 약하게 있지만 다행히 많이 호전돼, 사고를 치는 횟수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약물 치료를 계속 방치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조현병 환자 김순주(가명·35)씨의 아버지 김모(67)씨는 올해 3월 3일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한다. 김씨는 그날 딸 순주를 보살피는 교회 사람들로부터 "순주가 흉기난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주 사건으로 뉴스까지 났다고 했다. 김씨는 서둘러 인터넷을 검색했고, 뉴스 영상을 보자마자 단박에 순주임을 알아챘다. "딱봐도 우리 딸이더라고. 운동복 바지에 빨간 점퍼 차림." (관련 기사: 수도권 전철에서 30대 여성 흉기 난동...승객 3명 부상)
당시 순주씨는 열차 안에서 승객과 말다툼을 하다가 흉기를 휘둘렀다. 아버지 김씨는 "사건 전날 순주가 등산 중 피해망상 증세로 남자 등산객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상처를 입었다"며 "남자한테 맞으니 자기를 지키려고 흉기를 소지한 것 같다"고 딸의 범행 동기를 추측했다. 순주씨는 현재 구치소에 수감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범죄로 이어질 정도로 만성화된 망상은 순주씨 개인의 인생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망가뜨렸다. 중학생 때 조현병 증세가 찾아온 순주씨는 늦게라도 약을 먹으며 대학에 입학하는 등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약물 복용이 제대로 안 돼 인간 관계를 맺는 게 어려워졌다. 김씨는 "딸이 아르바이트를 다녔는데 처음엔 몇 달씩 잘 다니다가 나중엔 사나흘 근무하고 해고당하기를 반복했다"고 기억했다. 순주씨 병이 악화되면서 가정의 평화도 깨졌고, 끝내 김씨는 아내와 이혼을 했다.
김씨는 "딸이 어렸을 때부터 보였던 조현병 초기 증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순주씨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과 관계형성을 못하고 표정이 어둡다"는 말을 들었단다. 그는 "조현병은 초기에 발견해 치료하면 예후가 좋아지는데 늦게 알아차린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에서 지역지부장을 맡아 조현병 환우와 가족들에게교육 프로그램 등을 제공한다. 그는 꾸준한 약물 치료와 더불어 부모의 지속적 관심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씨는 자식의 조현병 때문에 협회로 찾아온 부모님들의 '뒤늦은 후회'를 여러 차례 지켜봤다고 증언했다.
"최근에 협회 모임에 새로 오신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자식을 잘못 훈육한 것 같아요'라고. 그러면서 눈물을 쏟으셨거든요. 이렇게 대부분 부모님들이 비슷해요. 정신질환을 잘 모르고 키운 것에 대해 많이 후회하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