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요, 오늘은 좀 늦게 왔네. 늘 먹던 거지?"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한 식당. 익숙한 듯 들어선 중년 부부가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은 콩국수 두 그릇을 잽싸게 내놨다.
"나는 여기 언니야가 해준 게 제일 맛있어!" 소녀처럼 신난 박선아(57·가명)씨가 국수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하자, 남편 김성학(57)씨가 바빠진다. "소금도 같이 넣어야 맛있지. 에이, 여기 또 흘렸네. 천천히 먹어요." 살뜰히 자신을 챙기는 남편 손길에 으쓱해진 선아씨가 취재팀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언니들, 우리 남편 너무 잘생겼지?"
평범한 주부로 자식 셋을 남부럽지 않게 키워낸 선아씨는 3년 전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만 54세. 초로기 치매(65세 이전에 발병하는 치매)였다. 막내딸이 스무 살 대학생이 되던 해였다. "밥솥에 생쌀만 넣어놓고 물 붓는 걸 까먹는 일이 잦아지더라고요. 건망증이 심해졌나 하고 넘겼는데, 치매라곤 상상도 못했죠." 성학씨의 눈가가 이내 뜨거워졌다.
아내의 기억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살림 베테랑이던 선아씨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이제 젓가락질밖에 없다. 아이들 이름이랑 얼굴을 헷갈리더니 이제는 본인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 선아씨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남편뿐이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동안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은 미아동에선 유명 인사다. 밤낮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모르는 주민이 없다. 처음 인터뷰 장소를 어디로 잡을지 묻자, 성학씨는 태연하게 말했다. "따로 장소 잡을 필요 없어요. 그냥 미아동 와서 전화주세요. 우리는 계속 여기를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부부의 하루는 걷기의 연속이었다. 잠자는 시간, 삼시세끼 밥 먹는 시간 빼고는 걷고 또 걷는다. 오전 7시 30분에 집에서 나와 놀이터 운동을 시작으로 동네 김밥집에서 아침을 챙겨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10시 30분 다시 집을 나선다. 오전 운동은 수유시장을 돌며 동네 골목을 오간다. 이후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니야'가 있는 칼제비집에서 점심(여름엔 콩국수를 먹는다)을 해결하고, 우이천로나 오패산 공원을 다녀오는 코스로 오후 산책에 나선다. 이렇게 부부는 하루 평균 15km 이상 2만5,000보를 걷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찜통더위나 동장군 속에서도 부부의 산책은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유난스럽다며 수군거리기도 하지만, 성학씨는 개의치 않는다. "남들이 뭐라 말하건 상관없어요. 우리 집사람 잃어버리지 않고 내 옆에만 있으면 됩니다."
부부가 24시간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이유는 선아씨의 배회 증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뒤로 아내는 성학씨가 출근한 사이 혼자 집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는 횟수가 잦아졌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강북구를 벗어나 은평구까지 무작정 걸어간 적도 있다. 2년 사이 실종 경보 문자만 네 차례나 보냈을 정도. 관내 경찰들도 금세 알아볼 만큼 선아씨는 '단골 실종자'였다.
치매 환자 10명 중 6명은 한 번씩 겪는다는 배회(Wandering). 환자나 보호자가 가장 애를 먹는 증상이다. 불시에, 혼자서, 예측 불가능한 경로로 다니다 보면 탈진해 쓰러지거나 실종될 위험이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추락할 수도 있다. 선아씨도 혼자 나갔다가 골목에서 나오는 차량에 치일 뻔한 아찔한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아내를 혼자 놔둘 수 없었던 성학씨는 작년 3월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를 전담해 돌보고 있다. 두 아들(군인·공무원)이 주는 용돈에, 가정 요양(75만 원) 급여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직장을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성학씨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간보호센터는 아내를 거부했다. 배회 증상이 심한 환자가 실종되면 문제가 커질 수 있으니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보내는 건 용납이 안 됐다. 손이 많이 가는 환자일수록 약을 먹여 잠만 재우려 한다는 얘기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죽음을 앞당기는 '방치'였다. "어디 그게 사람 사는 건가요." 성학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열악한 돌봄 시스템의 공백은 성학씨 같은 보호자의 희생으로 채워졌다. 아내를 재운 뒤 저녁 9시부터 한두 시간이 성학씨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아내의 배회는 계속된다. 화장실을 가겠다고 안방 창문에 매달리거나, 아이들 방을 들락날락하는 걸 쫓아다니느라 '통잠'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치매 환자의 배회 증세가 심해지면 보호자들의 삶도 우울해진다. 경기 성남에 사는 김정임(73·가명)씨도 밤마다 현관 앞에서 '보초'를 서며 쪽잠을 잔다. 2년 전 치매에 걸린 남편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성실히 일했던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출근해야 한다며 집 밖을 나선다고 한다. 분당에서 서울 문정동까지 발톱이 빠진 줄도 모른 채 걷다가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이기선(66)씨도 시도 때도 없이 나가는 남편의 뒤를 쫓느라 매일 서울 홍은동 일대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화장실 간 사이에, 잠겨 있는 문 대신 베란다로 뛰쳐나가는 남편을 막아서다 팔이 부러지고 무릎도 안 좋아졌다. '전쟁 같은 일상'에 지쳐 한강에 뛰어들 생각까지 했던 기선씨는 우울증에 걸렸다. "오죽하면 보호자가 제2의 예비 치매 환자란 말이 있겠어요.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는 고통이죠."
배회 감지기는 돌봄의 굴레에서 보호자들의 부담을 조금 덜어줄 수 있다. 감지기는 치매 환자가 혼자 외출하더라도, 실시간 위치 정보를 파악해 보호자에게 알려주는 손목시계형 장치다. 다만 수요 대비 공급이 턱없이 모자란 게 문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배회 감지기는 2,567대 무상 보급(2년 사용 기간 한정)됐다. 국내 치매 환자(96만 명) 규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이마저도 복지 당국의 예산으로는 보급되지 않고 있다. SK하이닉스가 2017년부터 추진해온 사회공헌 사업에 정부가 관리 업무만 손을 보탠 거라, 기업 후원이 끊기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 치매 환자가 배회 감지기 착용을 거부하면 손쓸 방법이 없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실종을 예방하기 위해 인식표(옷에 부착하는 스티커)도 보급되고 있지만, 홍보가 덜 돼 알아보는 시민들이 많지 않다.
오죽하면 보호자들조차 "배회에는 답이 없다"고 절규할까. 결국 '환자의 안전'과 '보호자의 일상'을 유지하는 절충안으로 잠금장치를 설치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학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사실상 감옥에 가두는 거나 다름없죠.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감금이냐, 삶의 포기냐. 보호자들은 성학씨처럼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
성학씨의 지극정성 탓일까. 선아씨는 폭력성도 줄고, 배회 증상도 많이 호전되고 있다. 아내에게 더 바라는 게 있을까. "글쎄요, 어떤 분들은 가족을 잊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아내가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선아라는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내가 기억해주길 바라요."
해가 저물었지만, 두 사람은 오늘의 산책을 마저 채우기 위해 서둘러 골목을 나섰다. "땀 좀 넘겨주세요." "(손부채질을 해주며) 시원해요?" "응, 바람 불어. 고마워요 남편." 두 사람은 그렇게 또 걷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지만, 행복한 산책은 이렇게 매일 계속된다.
▶치매 환자들은 왜 자꾸 길을 잃을까요. '당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통해, 치매 환자의 시야로 바라본 세상을 간접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제목이 클릭이 안 되면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91808310000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