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경을 넘어 북한 밖으로 나갈 참입니다. 10일부터 나흘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을 계기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전망입니다. 2019년 4월 같은 곳에서 양측 정상이 만난 후 4년여 만입니다. 북한은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 1월 이후 국경을 닫아걸고 외부와의 공식적인 접촉을 끊어왔습니다.
북한은 폐쇄적인 체제입니다. 그 지도자는 은둔의 제왕으로 불리지요. 자연히 김 위원장이 무엇을 타고, 어떤 경로로 러시아로 갈지가 관심입니다. 외부로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전용열차가 북한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취재진의 추격전이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김 위원장은 그간 해외 일정에 나서면서 기차와 항공기를 이용했습니다. 버스나 배를 탈 리는 없으니 뭐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교통수단이 던지는 메시지가 다릅니다. 김 위원장이 기차를 타고 오랜 시간이 걸려 육로로 이동할 때는 사회주의 우호국을 향한 친교 메시지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비행기를 타고 신속하게 목적지로 향하는 경우에는 실용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회담에 임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왜 그런지 살펴볼까요.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좋은 예입니다. 김 위원장은 2018년 회담 때 항공기를 이용해 싱가포르를 찾았습니다. 당시 평양을 출발해 베이징으로 향하던 에어차이나 여객기 CA122편은 베이징 도착 직전 급선회해 싱가포르로 향했습니다. 편명도 CA61로 바꿨죠. 에어차이나 항공기 이륙 전에는 고려항공 일류신(IL)-76 수송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이륙했고, 에어차이나 이륙 1시간 후에는 김 위원장의 전용기 ‘참매 1호’와 같은 기종인 IL-62M 항공기가 평양을 떠났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상징성과 북미 관계 개선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보였습니다.
반면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은 중국을 종단하는 기찻길을 택했습니다. 전용열차 ‘태양호’를 타고 평양을 출발해 국경도시 단둥을 지나 톈진, 정저우, 우한, 청사, 난닝을 거쳤고 중국과 베트남 국경을 넘어 하노이에서 170km 떨어진 베트남 란선성 동당역에서 내렸습니다. 이후 전용차로 2시간여를 달려 하노이에 도착했습니다. 66시간에 달하는 기나긴 여정을 감수했지요. 사회주의 우호국인 중국, 베트남을 감안해 육로를 택한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조부 김일성 주석이 1958년 북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던 육로 여정과도 흡사한 부분입니다. 대를 이은 우호관계를 북한과 중국, 베트남 국민들을 향해 한껏 선전한 셈입니다.
2011년 12월 집권한 김 위원장의 첫 번째 해외 일정은 2018년 3월 중국 베이징 방문이었습니다. 이때도 기차를 이용했죠. 국제무대 데뷔전을 사회주의 우호국 방문으로 시작해 관계를 증진하는 의미로 해석됐습니다.
반면 같은 해 5월 중국 다롄을 찾아 시진핑 주석과 재차 정상회담을 가질 때는 항공기를 이용했습니다. 당시는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중국과 관계는 이미 돈독하게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협상에 앞서 작전을 조율하고 코치를 받는 자리였죠. 이처럼 실용적인 목적이 강했던 터라 비행기를 탄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적지 않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푸틴 대통령을 만나러 가면서 어떤 교통수단을 선택할까요. 일단 기차가 우세합니다. 북한은 코로나19 이후 닫았던 국경을 개방하면서 함경북도 나진에서 러시아 하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교통망도 함께 열었습니다. 4년 전 김 위원장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을 당시와 같은 경로입니다. 한미일 3국 정상이 지난달 미국 대통령 전용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우의를 과시하며 공조를 강화한 만큼, 이에 맞서 김 위원장도 푸틴 대통령과 결속부터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일단 정상 간의 합이 제대로 들어맞아야 각종 협력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양측의 만남은 4년이나 지났으니 오랜만의 해후이기도 합니다. 기차를 이용할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는 대목입니다.
이와 달리 이번 북러 정상회담이 북한의 피폐한 경제를 복원하고 러시아와의 무기 수출 등 실용적 목적에 방점을 찍는다면 김 위원장은 참매 1호 전용기를 사용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열차로 이동하는 건 너무 한가해 보이니까요. 그의 전용기 참매 1호의 최대 항속거리는 9,200km에 달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에 무리가 없습니다. 북한 국영 고려항공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정기 노선을 운행해 왔던 만큼 민항기를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김 위원장이 예상을 깰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국회 정보위 간사인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7일 국정원 관계자를 인용해 “아마 언론에 선제적으로 공개가 됐기 때문에 기존 예상과 다른 경로를 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며 “기존에 언론에 공개된 경로와는 다른 경로로 깜짝 행보를 보일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경우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회담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자연히 이동거리를 감안해 교통편도 다시 고민해야겠죠.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 모두 접근하기 수월한 제3의 장소로는 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 하바롭스크가 거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