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가치 내세운 미국 외교...세계질서를 어떻게 이끌었나

입력
2023.09.0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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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의 외교(DIPLOMACY)

이른바 'G2'로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치열한 국제정세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외교전략으로 권위적인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럽에서 더 세를 불리고 쿼드, 파이브아이즈도 구성됐다. 한미일 군사협력체를 구축한 캠프 데이비드 선언은 동아시아 질서에 충격파를 예고한다. 그 타깃인 중국은 안보협력체로서 상하이협력기구를 1990년대 결성했고, 최근엔 브릭스(BRICs) 확대를 통해 미국의 봉쇄와 에너지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양상이다. 강대국 간의 이러한 갈등과 충돌 양상은 도돌이표처럼 세계 역사의 장면마다 등장한다. 미국의 외교전략가 헨리 키신저의 역작인 ‘외교(Diplomacy)’는 유럽의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 독일 통일 후 비스마르크 체제, 1·2차 세계대전의 전후 질서, 미국의 1극 체제까지 강대국 외교의 실상과 충돌을 살피고 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지배한 미국 외교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유럽의 오랜 안보전략이 세력 균형에 있었음에도, 미국은 왜 가치 외교와 집단안보에 집착하게 된 것일까. 독립전쟁을 끝내고선 유럽에 비켜 선 고립주의를, 국력이 신장한 20세기 초 즉,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엔 세력 균형에서 세계 정세를 봤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아시아 지배를 우려해 일본을 응원했고, 일본이 의외의 승리를 거두자 전리품으로 조선(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넘겨주면서도 일본을 견제했다. 민주주의 확산이 세계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란 미국식 가치, 이상주의 외교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에 꽃을 피워, 오늘날까지 미국 외교 전략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한다. 월슨주의를 통해 미국 중심의 드라마가 세계무대에 구현됐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도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은 아시아 방어선에 남한을 두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참전을 결정했다.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공산 세력에 맞서는 도덕적 의무, 저지 없이 이루어질 남한 점령이 가질 상징성에 기인했다는 것이다. 남한 방어가 실익이 없는 만큼 미국의 저항이 없을 것이란 소련이나 중국, 북한의 예상도 미국 전략에 대한 오판으로 봤다. 유엔군이 당초 38선 이북으로의 격퇴가 목표였으나 중국 국경까지 북진한 데는 인천상륙작전의 큰 성과에 경도됐다. 키신저는 평양 북쪽 청천강과 함흥만을 잇는 선에서 북진을 멈추는 게 바람직했다고 본다. 중국 국경에서 160km 떨어진 완충지대를 뒀다면 중공군 개입을 막으면서 미국이 정치적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키신저는 휴전 회담이 시작된 1951년 6월 미 육군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을 방문해 미군의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쓴 인연이 있다.

키신저는 “모든 세기마다 권력과 의지, 지적 도덕적 추진력을 갖추고 국제체제 전체를 자신의 가치에 따라 형성하는 국가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근세기 들어서도 많은 강대국과 세계 외교를 이끌었던 전략가들이 명멸했다. 지금은 미국의 가치가 1세기 이상 지배한 세계질서가 도전받고 있고 미중 전략경쟁의 끝은 예측불허다. 키신저는 보편가치에 기반한 이상주의와 세력균형 등 현실외교가 일치했을 때 미국 외교가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미 국무장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키신저는 100세가 되도록 '핵무기와 외교정책', '세계질서' 등 다수 저서를 냈다. 약 30년 전인 1995년 출간한 '외교'는 그의 대표작이다. 국내 완역본으로는 처음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하는 시점에 키신저의 '외교'는 지금의 국제질서를 관찰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키신저의 통찰은 외교관이나 학자에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기업이나 일반 독자에게도 유익하다.


정진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