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아야 하니까요.”
전 남자친구로부터 끔찍한 폭행을 당한 ‘바리캉 폭행남’의 피해자(21)가 지난 1일 본보와 인터뷰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 말이 무척 아팠다. 그 누구보다 사건을 잊고 싶을 그가 낸 용기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워서였다. 그는 가해자의 엽기적인 폭행에 들끓었던 여론이 쉽게 사그라질까 두렵다고 했다.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고, 제2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선 기억돼야 했다.
잊어선 안 되는 피해자는 또 있다. 지난달 3일 경기 분당 서현역 흉기난동 희생자 고 김혜빈(20)씨 유족은 딸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가해자 최원종보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딸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인 고 이희남씨 유족도 생전 모습과 이름을 언론에 알렸다. 희생자 유족들은 한결같이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주목받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흉악범죄가 발생하면 여론은 가해자에 집중한다. 범행이 잔혹할수록, 가해자가 비정상적일수록, 대중의 관심은 더 높아진다. 바리캉남의 신상과 과거 행적이 도마에 오르고, 서현역 인근 수억 원대 아파트에 혼자 거주한 최원종의 신상정보에 여론이 들썩인다. 지난달 서울 신림동 등산로에서 대낮에 너클을 끼고 30대 여교사를 해친 최윤종이나 7월 신림동에서 흉기난동으로 4명의 사상자를 낸 조선, 5월 부산에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정유정의 외롭고 불우한 삶도 크게 조명됐다. 대중의 들끓는 분노에 가해자들의 얼굴과 신상정보도 빠르게 공개됐다.
가해자에 관심이 쏠릴수록 피해자는 깊이 숨었다. 가해자가 드러날수록 피해자는 2차 가해에 쉽게 노출됐다. 범죄사실이 알려질수록 일상 회복은 되레 멀어졌다. 바리캉남 피해자는 “연인인데, 왜 그렇게 당했나”라는 가해의 시선에 더욱 움츠러들었다고 했다. 대중이 최원종의 범행 동기에 골몰하는 사이 뇌사 상태에 빠진 김혜빈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대중이 관심을 쏟기에 피해자들은 특별하지 않다. 평범했던 스물한 살 여대생은 남자친구의 감금과 폭행 이전에 약자를 지키고자 군인을 꿈꿨다고 했다. 최원종이 모는 차에 치인 미대생 김혜빈씨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외동딸인 그는 생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살고 싶다고 했었다. 같은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주부 이희남씨는 평일 저녁 남편과 오붓이 외식을 하기 위해 나오던 길이었다. 우리와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삶이다.
그래서 피해자를 기억해야 한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흉악범죄자들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살던 피해자들을 기억할 때 사회가 바뀐다. 비정상적인 소수의 흉악범보다 평범한 대다수의 피해자가 기억돼야 사회는 연대의 힘을 가질 수 있다. 흉악범죄 진상조사와 가해자 처벌, 피해자 지원방안 등 사회 안전 시스템은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과거 사회적 참사가 이를 증명한다. ‘세월호 참사 특별법(2015년)’ ‘윤창호법(2018년)’ ‘민식이법(2019년)’ ‘정인이법(2021년)’ ‘이태원 참사 특별법(2023년)’ 등은 희생자의 용기와 남은 이들의 공감과 연대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