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살. 사회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처신을 ‘즉시 출력’하기엔 조금 복잡한 숫자다. 사무실에서 만나는 띠동갑 후배에겐 대단한 어른은 아니지만 편하게 농담을 건네기는 어려울 만큼 많은 나이일 테고, 또 위로 열댓 살 이상 많은 선배나 임원들은 심플하게 '요즘 애들'로 퉁칠 수도 있는 나이다. 내일모레 환갑인 엄마의 시선에서는 '저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것 같은' 나이고, 어찌어찌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에 속하지만 정작 ‘청년’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벤트에서는 슬슬 배제되기 시작한다. 이 애매한 서른여섯을 겪고 있는 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성숙하지 못한 정신과 예상보다 이르게 삐걱거리는 몸을 한데 끌어안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마주했던 30대 중ㆍ후반 어른들은 말 그대로 '어른'이었다. 오래 다닌 직장과 안정된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부모이자 성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들. 성인이 된 후로도 상당한 기간 30대 후반의 어른을 떠올리면 그 정도의 성숙함이 탑재된 모습만을 상상했다. 그러나 그 또래에 근접해 갈수록 실감했다. 아, 놀랍도록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하지만 날뛰는 내면과 달리 겉으로는 착실히 한 살씩을 쌓아갔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에 맞추어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으로 팀장을 맡았을 무렵, 연차 차이가 조금 나는 20대 초반 팀원들과의 관계가 특히 그러했다. 친근했으나 묘하게 좀 더 깍듯했고, 내가 농담을 던지면 하하 웃었지만 티키타카는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다 눈치껏 먼저 자리를 뜨는 일이 잦아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또래 동료들과 친구처럼 웃고 떠들며 일했던 기억들이 생생했기에 처음에는 그런 변화가 조금 낯설고 서운했다.
그러나 되짚어 보니, 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들에게는 내 존재 자체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며, 지나치게 거리낌 없이 대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 역시 선배나 상사가 어려워 호의마저 부담스러웠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받는 쪽이 편하게 느낀다면 허물없이 대해도 괜찮겠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어려워하거나 불편하게 느낄 것 같다면 눈치껏 파악해 정도를 조절하는 건 내 몫이어야 했다.
나와 동료들이 남몰래 ‘청꼰(청바지 입은 꼰대)’이라 칭했던 과거의 어느 상사가 머리를 스쳤다. 본인이 상당히 젊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말은 잘 듣지 않고, 1980년대생인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1970년대 감성의 개그를 던지고는 혼자 폭소하던 분이었다. 아아…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내게 언제나 피곤하고 약간은 비굴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는데,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눈치도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보다는, 자칫 내 눈치를 살필 수 있는 누군가가 불편하지 않도록 먼저 눈치를 보는 능력이.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많이 하고, 조언보다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적당히 눈치 볼 줄 아는 어른으로 나이 든다는 것. 아직 갈 길은 멀겠지만 꽤 괜찮은 목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