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대신 덴마크인을 만나라"…'관광의 종말' 선언한 코펜하겐

입력
2023.08.3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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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마을 : 오버투어리즘의 습격>
코펜하겐, 2017년 양 팽창 포기 관광 정책 전환
'뺑뺑이' 단체 관광 대신 주민 참여 지역 체험
'덴마크 진짜 삶 알리자' 집밥 먹고 현지인 탐방
거쳐가는 도시 탈피…관광객 '일시적 주민으로'
'재방문율·지역경제…' 기여 평가 기준도 개선

편집자주

엔데믹(코로나19의 풍토병화)과 유커(중국 단체 관광객)의 귀환이라는 희소식에도 웃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마을형 관광지 주민들이다. 외지인과 외부 자본에 망가진 터전이 더 엉망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국내 마을형 관광지 11곳과 해외 주요 도시를 심층 취재해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의 심각성과 해법을 담아 5회에 걸쳐 보도한다.



20여 척의 선박이 닻을 내린 채 쉬고 있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랑겔리니 해안가. 색이 바랜 80㎝ 높이의 인어공주상이 바위에 앉아 있다. 덴마크 출신 동화 작가 한스 안데르센의 대표작 인어공주를 형상화한 작품인데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서울의 남산 서울타워 같은 랜드마크인 셈이다.

하지만, 기자가 랑겔리니 해안을 찾은 지난 15일에는 명성과 달리 한산했다. 주변에는 관광버스 두세 대만 눈에 띄었다. 5년 전만 해도 '인증샷' 인파가 몰려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고 교통체증이 심했던 곳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변화는 이 도시가 2017년 '관광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일보는 엔데믹(코로나19의 풍토병화) 이후 "외국 관광객을 2배(2019년 1750만 명→2027년 3,000만 명) 늘리겠다"고 밝힌 우리 정부와는 다른 길을 가는 코펜하겐의 전략을 현지에서 직접 살펴봤다.

"관광객을 코펜하겐 '임시 주민'으로 만들자"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오버투어리즘(과잉관광) 문제가 심각해진 뒤 대응했지만, 우리는 미리 대안을 찾기로 했죠. '(전통적 방식의) 관광은 끝났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죠.

16일 오후, 코펜하겐 뇌레가데 거리의 사무실에서 만난 '원더풀 코펜하겐'(코펜하겐 관광청)의 정책개발 담당 루나 사브로는 2017년 25쪽 분량의 보고서를 낸 이유를 설명했다. 보고서에는 '코펜하겐 관광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때까지 이 도시의 관광 정책은 우리와 다를 게 없었다. 단체관광객을 유치해 인어공주상과 국립 박물관, 로젠보르 궁전 등 유명 관광지 위주로 돌렸다. 전년보다 관광객 수가 늘어나면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여행객들에게 코펜하겐은 '머무는 도시'가 아닌 '거쳐가는 도시'였다. 5개 안팎의 유명 관광지만 훑고 금세 떠나 버리니 지갑을 열지 않았다. 일부 관광 명소만 혼잡해 주민 불편도 생겼다. 주민 입장에서도 관광 덕에 경제적으로 얻는 게 별로 없었다.

원더풀 코펜하겐은 결단을 내렸다. 관광객 수에 목매는 양적 팽창 정책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브로는 "여행객 한 명이 오더라도 덴마크의 진짜 삶과 문화를 보여줘 이들을 매료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제대로 정착하면 관광객들이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쓰는 돈도 늘 것이라고 판단했다. 코펜하겐의 진짜 매력은 인어공주상이 아닌 덴마크 사람과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본 것이다. 기존 관광 정책을 버려야 오버투어리즘의 폐해도 줄이고 파리나 바르셀로나, 런던 등 쟁쟁한 경쟁 도시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코펜하겐은 3가지 포인트를 정했다. 우선 관광객을 '일시적 주민'으로 만들기로 했다. 사브로는 "관광객이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찬찬히 느끼고 탐색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스스로 지역 사회의 일부로 여기도록 하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코펜하겐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다시 찾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전략에 맞게 관광 프로그램도 다시 짰다. 코펜하겐 인근 항구 주민들이 여행객에게 역사와 문화를 설명해주는 '비욘드 코펜하겐'이 대표적이다. 항구와 해변가를 돌아보고 바이킹 박물관 등 덴마크인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도 방문한다.

음식 축제인 '코펜하겐 쿠킹'도 만들었다. 주민과 관광객이 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코펜하겐의 문화와 음식, 전통을 얘기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사브로는 "관광객이 주민과 어울리다 보면 자신도 코펜하겐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덴마크 집밥 먹으며 진짜 코펜하겐 이야기 나누다…주민이 만드는 관광


두 번째 포인트는 '주민이 이끄는 관광'이다. 관(官)이 주도해 관광 정책을 짜는 대신 민간의 상상력에 맡겨보기로 했다. 코펜하겐 사람들은 욕심이 있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의 78%가 관광 도시로 더 유명해지길 바랐다. 다만 관광객과의 접점이 없다 보니 나와 관련 없는 이방인으로 느꼈고 이들이 일상을 침해할 때 불편한 감정이 커졌다.

기자는 주민이 주도하는 대표적 관광 상품인 '덴마크인을 만나다'(meet the Dane)에 직접 참여해봤다. 시민 22명이 연간 500개 정도의 외국인 관광팀을 집으로 초대해 덴마크의 진짜 문화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참가비는 90달러(약 11만 원)였다. 운영진 중 한 명인 마리아나 듀퐁트(58)는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코펜하겐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도시를 잘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초대받은 집으로 찾아가니 60대 주인인 토빈 아렌트와 메이 커크널 부부가 문을 열어줬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잡지사 기자와 엔지니어로 일하는 평범한 주민이다. 이들은 테라스 식탁 위에 덴마크 특산품인 치즈와 소시지, 와인 등을 내왔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자 덴마크 집밥이 나왔다. 호밀빵 위에 새우가 얹혀진 애피타이저부터 구운 식빵에 버섯과 바질을 얹은 토스트, 돼지고기 바비큐까지. '진짜 덴마크에 왔다'는 생각이 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렌트 부부는 코펜하겐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대화를 주도했다.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 표를 넣는 개찰구가 없어 신기했다"고 말하자, 커크널은 "덴마크는 신뢰를 토대로 한 사회"라며 "누군가 검사하지 않아도 규칙을 지킬 것이란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세금이 많은 대신 촘촘하게 짜인 덴마크 의료보험 체계와 인도보다 더 넓고 매끈하게 설치된 자전거길, 중세시대 건물을 잘 보존해 도시 전체가 박물관처럼 보이는 코펜하겐의 매력까지. 3시간 30분간 살아있는 얘기를 들었다.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는 건 그들에게도 일종의 '여행'이다. 아렌트는 "단지 돈을 벌려고 외국 여행객을 초대한 건 아니다"라며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취미이자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코펜하겐 관광 정책의 세 번째 포인트는 달라진 평가 기준이다. 원더풀 코펜하겐은 ①관광객 재방문율 ②혁신 관광 프로그램 개발(친환경 관광 등) ③지역경제 기여도 ④지속 가능한 관광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관광 사업의 성공 여부를 평가한다. 얼마나 많은 관광객을 유치했는지 또는 관광 인프라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과는 달랐다.



"주민·상인·정부 모두 '관광 정책의 전환' 동의하는 게 중요"


'관광의 종말' 선언 이후 도입한 새 정책의 효과는 천천히 드러나고 있다. 덴마크 관광청에 따르면 2019년 이 나라를 찾은 외국인의 숙박 건수는 2,890만 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잠시 거치는 곳이 아닌 머무는 도시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다만,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20년에는 1,610만 건으로 줄었다. 올해는 덴마크와 코펜하겐에 오래 머물고 가는 관광객 수를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게 목표다. 사브로는 "기후위기 때문에 여름이 더 더워지면서 남유럽으로 가던 휴가를 덴마크로 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웃었다.

사브로는 질적 관광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며 한국에 묵직한 조언을 던졌다.

어렵더라도 관광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여행객이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이 지역을 살리는 길이라는 걸 주민·상인·정부가 모두 인식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마을형 관광지의 흥망사

②비극은 캐리어 소리부터

③저가 관광과 손잡은 시장님

④다가오는 관광의 종말

⑤숫자보다 중요한 것들

코펜하겐= 송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