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법원장 재직 시절 "한국 문화재가 잘 보존된 것은 일제의 영향"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이 알려져 역사 인식 논란이 일고 있다. 이 후보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일제 강제징용 판결 등 민감한 사건들이 법원에 걸려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지일파'로 알려진 이 후보자 스스로가 언행을 유의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 후보자는 대전고법원장 재임 시절(2021년 2월~올해 2월) 법원사무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문화재가 잘 보존된 것은 일제의 영향"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법원공무원노조는 제보를 입수하고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다. 이 후보자는 당시 문화재 이외에도 한일 관계에 대한 견해를 수차례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동석했던 법원 구성원들 사이에선 부적절한 내용이 상당수 있었다는 전언이 이어졌다고 한다. 법원노조는 23일부터 내부 게시판 공지를 통해 관련 제보를 수집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 측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보호 개념이 도입된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했을 뿐 '일제의 도움'을 주장한 취지는 아니라고 해명했다. 한국일보가 해당 발언의 진위와 경위 등을 묻자, 이 후보자 측은 "조선시대 왕릉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문화재 보호라는 개념이 일제시대에 도입됐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언급한 적은 있으나, 우리 문화재의 보존이 일본 관리 덕분이라는 취지로 얘기한 적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이어 "일본과 우리나라의 국민성을 비교해 우열을 이야기한 적도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이 후보자는 1994년과 2002년 두 차례 일본 게이오대학에 교육파견을 다녀와, 법원 내에서 일본 법제와 문화에 해박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일본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걸 넘어 선망하는 수준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 강제징용 배상이나 배상금 공탁 불수리 등 한일관계를 둘러싼 법적 쟁점이 해결되지 않은 만큼, 일본 문제에 대한 사법부 수장의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경우 '공정한 외관'이 무너지며 또 다른 정치적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수도권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 후보자가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본인 입장에선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일 수 있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역사관에 가까울 수 있다"며 "문제제기가 공식적으로 나올 정도면, 의사 표현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한 변호사는 "고위 법관들은 엘리트 문화가 정착된 일본 사법부를 우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다만 (이 후보자가) 원칙주의자인 만큼 판결의 공정성을 해칠 인물은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