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의 맏형 노릇을 해 왔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55년 만에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이름을 바꾸고 새 출발에 나선다. 새 회장에는 류진(65) 풍산그룹 회장을 선임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을 계기로 전경련을 탈퇴한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의 15개 계열사도 한경협에 합류하면서 정경유착 재발 우려를 씻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경련은 22일 서울 영등포구 전경련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기관 명칭을 한경협으로 바꾸고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을 한경협에 흡수 통합하는 내용의 정관 변경안을 의결했다.
전경련은 기존 한경연의 조직, 인력, 자산, 회원을 모두 승계한다. 이를 통해 싱크탱크형 민간 경제단체로 거듭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재계에서는 급변하는 통상 환경에서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어왔다.
정재계 인맥이 두터운 류 회장이 새 회장으로 추대된 것도 이런 배경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방위산업체인 만큼 풍산은 일찌감치 대미 관계에 공을 들여왔다. 류 회장은 선대 회장부터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부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등 미국 정·재계와 인연이 깊은 '미국통'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은 이사를 맡고 있는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를 전경련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으며 "중립적이고 모든 분야 이슈에 대해 깊이 있는 정보를 가진 기관"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리나라 경제 상황에서 필요한 정보를 생산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경련이 한경연 회원을 이어받으면서 2016, 2017년 전경련을 나왔지만 한경연 회원사로 남은 4대 그룹 15개 계열사도 자연스럽게 한경협에 합류하게 됐다. 한경연까지 탈퇴한 포스코도 재가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싱크탱크'로 탈바꿈하기 위한 한경연 흡수가 그룹사들의 전경련 재가입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도 나온다. 2016년 국회 국정농단 사건 청문회에서 고 구본무 전 LG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운영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전경련을 탈퇴하고 이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싱크탱크 형태를 만드는 데 지원하겠느냐"는 하태경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의 질의에 "좋은 취지의 사업이 있으면 저희가 더 열심히 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실제 임시총회 직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전경련 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재벌 그룹의 전경련 재가입을 규탄하고 전경련 해체를 요구했다.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재벌 그룹의) 전경련 재가입은 재벌공화국으로의 회귀를 공식화한 것이자 국정농단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정경유착 재발 우려를 차단하기 위해 전경련은 내부 통제 시스템으로 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을 정관에 담았다. 위원 선정 등 윤리위 구성과 세부 운영 사항 등은 앞으로 확정할 계획이다. 사무국과 회원사가 지켜야 할 윤리 헌장도 채택했다. 그러나 윤리위원회 설치는 5월 발표한 혁신안에 포함됐고 이날 새로 발표된 윤리헌장 역시 제재 조항이 없는 선언적 성격이 짙다. 전경련 관계자는 "윤리위원회가 설치되면 (회원사의) 정경유착 우려를 차단할 구체적 방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새 이름 사용과 4개 그룹 합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정관 변경이 승인된 9월 이후 이뤄진다. 상근부회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된 김창범 전 인도네시아 대사의 부임은 정관 변경 뒤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2월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으로 취임한 김병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은 6개월 임기를 마치고 고문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