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서 한밤중 흉기를 들고 배회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60대 남성을 "구속하지 말아달라"며 시민 1,015명이 법원에 탄원서를 낸 사연이 알려졌다. 피의자인 박모씨는 중증 발달장애인이자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피해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22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혜화경찰서는 지난 17일 밤 종로구 대학로 인근에서 흉기를 들고 배회하고 괴성을 지른 혐의로 박씨를 긴급체포했다. 박씨는 실제로 흉기로 남을 위협하거나 해치지는 않았다. 이에 경찰은 박씨에게 폭력행위처벌법을 적용했다가, 공포심을 느꼈다는 목격자 진술을 고려해 18일 특수협박죄로 혐의를 변경했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집에서 동영상을 보는데 밖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칼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박씨가 19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법원에 탄원이 빗발쳤다. 20년 넘게 박씨를 지원해 온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은 이날 약 3시간 만에 인권단체와 개인 등이 작성한 탄원서 1,015건이 모였다고 밝혔다.
홈리스행동이 작성한 탄원서에는 박씨의 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탄원서에 따르면, 박씨는 장애등급제 폐지 이전에 '2급 지적장애' 판정을 받은 중증 발달장애인이다. 지능지수는 35~49, 정신연령은 3~7세 수준이다. 홈리스행동 측은 "장애 특성상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압박, 외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자극을 받을 때면 사건의 인과성을 합리적으로 판별하지 못해 큰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하고 과잉행동을 하는 일이 잦았다"면서 "그러나 이런 행동이 타인을 향한 실제적인 위해로 이어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박씨가 뇌경색과 급성신부전 등 질환을 앓고 있어 물리적으로 타인을 해치기도 어렵다고 했다.
박씨는 과거 부산 형제복지원에 수년간 강제 수용됐던 피해자였다. 형제복지원은 1970~80년대 부랑인 교화를 목적으로 세워진 시설로 고아와 장애인 등 수천 명을 불법 감금해 강제 노동과 가혹 행위 등을 일삼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8월 조사를 통해 형제복지원 피해자 191명에 대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판단했다. 올해 새로운 피해자(146명)가 추가돼 공식 확인된 피해자만 337명이다. 사망자 등 비공식 피해자는 1,0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복지원에서 강제 노역과 폭행, 가혹 행위를 당한 박씨도 공식 피해자 중 한 명으로 확인됐다. 박씨는 지난해 진실화해위에 피해 사실을 진술해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박씨는 60대로 알려졌지만 나이조차 정확하지 않다. 출생 등록이 안 된 상태로 1983년이 되어서야 호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상에는 1962년으로 등록됐지만, 이보다 열 살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는 가까스로 형제복지원을 탈출해 연탄 가게, 떡공장, 양계장 등에서 무급으로 일을 하며 주거를 구했다. 부랑인 시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그러다 박씨는 지난해 9월에야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해 처음으로 '집'에서 살게 됐다.
탄원서를 낸 시민들은 박씨가 공포감을 조성한 점은 사실이지만, 장애 특성과 생애를 고려할 때 구속의 필요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탄원서에는 "박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스스로 정신과적 치료를 받겠다고 마음먹고 경찰에도 그렇게 진술했다"며 "박씨 곁에는 홈리스 동료, 홈리스야학 학생들, 홈리스행동, 반빈곤 단체 활동가들이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법원은 박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서울중앙지법 김봉규 부장판사는 19일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도망의 염려와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을 고려했다"며 영장 발부 이유를 밝혔다. 홈리스행동 측은 "해당 사건이 의도적 범죄행위가 아닌 중증 발달장애인의 과잉행동임을 고려해 불구속할 것을 요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며 "박씨가 흉악범으로 둔갑되지 않고 공정한 법의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연대를 요청드린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