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은 왜 타깃이 됐을까

입력
2023.08.16 18:00
26면
"반국가세력의 유엔사 개입 차단 목적"
전 정권 정책에 대한 정치적 폄훼 지나쳐 
틀을 깬 정책, 정치 대신 논리로 예우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2007년 9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계기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했을 때 일이다.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끝내는 문제를 논의했다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잘 못들었다”면서 다시 말해달라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마지못해 "한국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김정일이 핵무기 계획을 제거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재차 말했다. 노 대통령은 통역 과정에서 ‘종전선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자 채근한 것이다. 이를 두고 노 대통령의 결례나 통역 실수 논란이 빚어졌다.

한 달 뒤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선언에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이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는 데 협력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노 대통령이 미국의 보증을 받아 종전선언 추진을 포함시킨 것이다. 언론 헤드라인은 종전선언이었고, 논란이 뒤를 이었다. 이른바 입구론과 출구론 논쟁이다. 종전선언을 기초로 비핵화 진전을 이뤄나갈 수 있다는 당시 청와대 논리와 개발에 속도를 낸 북핵은 물론 군사적 대치상황 등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선언의 실효가 뭐냐는 논란이다. 전쟁사적으로도 종전선언은 평화조약과 함께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북한 의중을 모르는 상황에서 종전선언 추진이 가져올 제반 문제는 훨씬 더 복잡다단하기도 했다.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은 트럼프·김정은의 싱가포르, 하노이 회담을 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종전선언은 문 대통령이 원하는 내용이지, 북한은 관심이 없다고 진작에 말했다"고 적었다. 볼턴의 편향적 성향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북한의 의중은 북핵에 대한 입장만큼이나 가변적으로 보인다.

9년의 보수정부 뒤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2018년 4·27 판문점 남북 정상 선언을 통해 연내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남북미중 4자회담을 적극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종전선언은 민주당 정부의 남북관계 레거시 정책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부시 대통령조차 시드니 정상회담 1년 전 한반도 전쟁 종식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종전선언을 정치적 타깃으로 삼았다. 반국가세력이 유엔사 전력의 자동 개입을 막기 위해 종전선언 합창을 하고 있다는 발언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한 달 전 자유총연맹에서 했다. 시기와 장소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이지만 전 정권에 대한 폄훼 논란이 빚어지고, 야권의 반발을 불렀다. 대통령실은 전 정권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뺨 때리고 어르는 격이다. 의욕만 넘친 전 정권의 종전선언 추진만큼이나 윤 대통령의 발언 역시 정치 공세에 가깝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이를 받아 "전시납북자 국군포로 문제가 묻히게 된다"고 했다. 한미의 전 정권이 어려운 협의를 통해 도출해낸 종전선언 언급 약사로 볼 때 이를 반국가세력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유엔사 차단, 국군포로를 연결한 논리는 와닿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대일본 접근법은 기존의 정치 문법이나 틀을 깨고 있다. 거센 저항 등 길을 뚫는데 힘겨운 과정을 겪고 있다. 전 정권의 틀을 깬 남북관계 접근법에 대해서도 인식 차가 어떠하든 정교한 논리로 반박하거나 접근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치고받는 정치라도 예우는 있어야 한다.

정진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