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십승지 우복고을’, 당진영덕고속도로 화남IC에서 경북 상주시 화북면으로 들어서는 갈령터널 위에 커다랗게 내걸린 문구다. 이곳 말고도 화북면 곳곳에서 ‘우복동(牛腹洞)’이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소의 뱃속처럼 편안한 동네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에 전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근거한 이상향이다. 십승지지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 피난지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의 예언서 정감록, 예언가 남사고의 유록,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등에 언급돼 있다. 10개 장소는 문헌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충북 보은 속리산 아래도 그중 한 곳으로 언급된다. 상주 화북면은 보은에서 십승지라 주장하는 마로면 구병산마을 동쪽이다.
사실 ‘십승지’라 자랑하는 곳은 대개 외부와 막혀 있는 오지였다. 과장해서 말하면 존재 자체가 희미해 전란과 거리가 멀고 천재지변이 닥쳐도 바깥에 알려지기까지 시일이 걸렸을 곳이다. 자연환경이 빼어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화북면은 서쪽 속리산, 동쪽 청화산과 도장산 사이 계곡 주변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다. 지리적이나 정서적으로 충북과 가깝다. 괴산에서 남쪽으로 연결되는 지방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우측으로 속리산국립공원 표지판이 보인다.
화북오송탐방지원센터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느닷없이 ‘견훤산성 700m’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느닷없다 하는 건 길가에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이 없을뿐더러 사람이 걸을 인도조차 없기 때문이다. 주차장은 개울 건너편에 있다. ‘견훤산성’ 표지판을 봤을 때는 이미 주차장 입구를 지나친 상태라 상류에서 되돌아와야 한다. 최근 개장한 ‘시어동 휴양체험단지’ 주차장인데 이용객이 거의 없어 한적하다.
안내판은 불친절하지만 산성으로 가는 탐방로는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가파른 구간은 계단으로, 흙이 쓸려 내릴 만한 경사에는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걷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다만 700m라는 거리만 믿고 만만하게 여기면 곤란하다. 산성까지 꾸준히 오르막이다. 쉬지 않고 걸어도 족히 20분은 걸린다. 막바지 구간 짧은 계단을 올라 커다란 바위를 끼고 돌면 바로 견훤산성이다. 방금 돌아온 바위 위에도 층층이 석축이 쌓여 있다. 바위 자체가 산성의 일부다.
산성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쌓았다 해서 견훤산성이라고 불린다. 실제 견훤의 군사가 쌓았는지, 이곳에서 어떤 전투를 벌였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견훤산성이 된 연유는 명확하다. 견훤과 부친 아자개가 상주 가은현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진성여왕 6년(892) 신라에 반기를 들었고 효공왕 4년(900)에는 완산주(현재의 전북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왕건에 항복해 끝내 역사의 승자가 되지 못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큰 인물로 대접받는 듯하다.
산성은 장바위산(541m) 정상부를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감싸고 있다. 인근 보은의 삼년산성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정교한 것으로 평가된다. 650m 성벽은 산세와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암벽을 이룬 큰 바위를 그대로 두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석축을 둘렀다. 고된 노동에 시달렸을 군사와 민초가 미적 감각까지 고려했을까만 자연과 성벽의 조화가 예술이다.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동남쪽 성벽은 주름치마처럼 곡선이 유려하다. 특히 물결치듯 휘어진 성벽에 매달린 것 같은 바위가 압권이다. 일부러 내어 쌓은 것처럼 삐죽하게 돌출된 암석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자라고 있다.
낭떠러지를 이루는 성벽 바깥과 달리 안쪽으로 연결된 산성길은 군사시설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근하다. 마치 오래된 마을의 돌담길을 걷는 것 같은 정겨움까지 느껴진다. 푸르스름한 이끼를 잔뜩 뒤집어쓴 성돌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느껴지고, 일부 허물어진 모습조차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서쪽 성벽을 걸을 때는 속리산의 웅장한 풍광에 압도된다. 문장대에서 연결되는 기암 능선이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가파르게 흘러내린 산자락의 품이 넓고도 푸르다. 모두들 정상인 문장대만 바라고 바쁘게 발걸음을 옮길 때, 그 길목에서 있는 듯 없는 듯 1,000년을 묵묵히 지켜온 산성이다.
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특이하게도 약 200m 구간 솔숲을 통과한다. ‘상오리 맥문동솔숲’이다. 수백 년은 된 듯한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해 100여 그루가 멋들어진 숲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자리에 주차장이 있으니 바쁘지 않은 여행자라면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그늘 짙은 솔숲에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군데군데 벤치를 설치해 놓았다. 바닥에는 맥문동을 가꿔 가느다란 꽃대에서 보라색 꽃송이가 피어나고 있다. 이번 주말이면 절정에 이를 듯하다.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끼는 아침이면 몽환적인 풍광을 담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가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우복동의 편안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곳이다.
솔숲에서 약 600m 떨어진 개울가에 장각폭포가 있다. 깊은 산중이 아니라 마을 바로 뒤편 계곡에서 쏟아지는 6m 높이의 물줄기다. 보기에만 시원한 게 아니라 여름철 주민과 피서객이 더위를 식히는 곳이다. 폭포수 바로 아래는 수심이 깊어 입수가 금지돼 있고 주변 얕은 물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다. 폭포 바로 위에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올라앉아 있다. 근래에 새로 지은 듯한 정자는 별로 볼품이 없는데 안내판 해설이 일품이다. ‘금란’은 주역에서 따온 말로 난초 같이 향기로운 두 사람의 마음을 모으면 쇠붙이도 끊을 수 있다는 비유라 한다. 지고 지순한 우정과 사랑, 나아가 이웃 간의 우의를 강조한 작명이다.
폭포에서 약 1.5km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밭 한가운데에 석탑 1기가 세워져 있다. 상오리칠층석탑이다. 옛날 장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전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탑신이 늘씬하면서도 균형이 뛰어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물로 지정돼 ‘우복동’ 화북면의 또 다른 자랑거리지만 이름난 폐사지에 비하면 방치된 수준이라 조금은 쓸쓸하다.
면 소재지에서 문경으로 이어지는 도로 어귀에 속리산 시비공원이 있다. 충절을 담은 애국시, 우복동에 안거하는 탈속시, 주변 산천을 찬미하는 유람시 등을 돌에 새겨 조성한 작은 공원이다. 인근 도장산과 함께 ‘용유동’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 문경 농암면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유계곡이고, 그중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곳을 용유구곡이라 이름했다.
1곡 동천석은 계곡 산비탈에 비스듬하게 누운 바위다. ‘동천(洞天)’이라는 글자가 물 흐르듯 유려한 초서로 새겨져 있다. 2곡 연좌암은 계곡에서 홀로 동떨어진 커다란 바위다. 연회를 베풀어도 될 정도로 펑퍼짐한 바위 위에 대여섯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가 신선처럼 편안하게 참선하는 모양새다. 용유계곡을 문경에서는 쌍용계곡이라 부른다. 용유구곡도 1·2곡을 제외하면 문경 농암면에 위치한다.
속리산국립공원 초입에는 오송폭포가 있다. 옛날 주변에 자라던 다섯 그루의 소나무와 멋들어진 조화를 이뤘던 듯하다. 주차장에서 약 300m만 걸으면 요란한 물소리가 계곡에 가득하다. 15m 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몇 차례 바위에 부딪히며 부서진다. 서늘한 물보라가 안개처럼 계곡을 일렁거린다. 삼복더위도 잠시 잊을 듯한 풍광이다. 국립공원 내에 있어 오송폭포 주변에서는 물놀이를 할 수 없다.
이곳에서 약 10km 떨어진 백악산 자락에는 옥양폭포가 있다. 괴산과 경계를 이루는 입석리 도로변 공터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 약 300m 오르면 만날 수 있는 폭포다. 옥양폭포는 높이 20m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데, 중간에 대들보처럼 길쭉한 암석이 가로지르고 있다. 물줄기는 다리처럼 들뜬 바위 사이로 떨어진다. 억겁의 시간이 빚은 자연의 작품이다. 물소리 시원한 폭포 아래 계곡은 여름철 인근 주민들이 더위를 식히는 곳이다.
우복동도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낸 건 아닌 모양이다. 인근 장암리에 독립운동기념비가 있다. 3·1 만세운동 소식이 뒤늦게 알려져, 1919년 4월 8일 장암리 이장을 비롯해 70여 면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문장대로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당시 마을 글방이던 신일서숙 터다. 엄연한 현충시설인데 현재 마을회관 옆에 존재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쓸쓸하기 그지없다. 이성범, 김재갑, 이용희 등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일경에 체포돼 1년 6개월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