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는 동성애가 없다. 따라서 동성애는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암수의 결합만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이라는 이 같은 고정관념은 오랫동안 일반은 물론 과학계도 지배했다. 신간 '생물학적 풍요'는 포유류에서 양서류에 이르기까지 무려 190여 종의 동물 동성애 사례를 바탕으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캐나다 생물·언어학자인 브루스 배게밀이 1999년 미국 등에서 펴내 화제가 된 책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번역 출간됐다.
책은 동물의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섹슈얼리티 연구를 집대성해 사례가 풍부한 게 특징이다. 분량만 1,300쪽이 넘고 저자가 20세기 후반까지 문서화한 450여 종의 동물 동성애 사례 중 190여 종의 포유류,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류 등의 동성애 양태가 백과사전식으로 담겼다.
저자 이전의 동물학과 생물학계는 동물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해 이성애와 번식 중심주의로 바라보는 게 지배적이었다. 동성 간에 교미를 흉내 내는 마운팅 행동이나 기타 성적 활동을 이성애를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활동쯤으로 봤다. 또는 잘못된 성 식별이나 병에 의해 발생하는 오류로 치부했다. 이 같은 해석에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동성애의 의미를 구애, 애정, 짝 결합, 육아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으로 확장해 해석한다.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서 동성애 표현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고려하지 않으면 동성애라는 현상의 본질적 성격과 맥락, 종 간 비교의 의미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저자는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기이하다”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의 말을 인용하며 기이한(queer) 동물의 삶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딱딱한 논문 형식이 아닌 자세한 설명식 서술로 쓰인 대중과학서에 가깝다. 다소 무겁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제지만 구체적 사례와 삽화·사진까지 동원하며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가령 보노보노가 성적인 상호작용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손동작의 ‘어휘’ 등을 삽화로 그려 넣고 설명하는 식이다.
책은 이성애만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학적 근거를 담은 역작이다. 미국 연방대법원과 인도 대법원 판결에 인용 또는 활용되는 등 사회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원초적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인 이 세계관에서 성별은 만화경처럼 다채롭고, 성애는 다양하며, 남성과 여성의 범주는 유동적이고 변화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