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경남 거제에 상륙한 제6호 태풍 '카눈'이 이례적으로 느린 속도로 한반도를 관통해 풍수해 피해가 클 것으로 우려된다. 카눈이 더딘 진행 속도를 보이는 이유를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한 세기 전 일본 기상학자에 의해 제기된 '후지와라 효과'설도 부상하고 있다. 뒤따라 북상 중인 제7호 태풍 '란'과 카눈의 상호작용이 카눈의 진로와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카눈은 오전 10시 기준 시속 30㎞로 경남 통영 북동쪽 약 20㎞ 해상에서 북진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속 40~60㎞로 우리나라에 상륙했던 제11호 태풍 '힌남노'와 비교해도 한참 느린 속도다.
카눈은 정오쯤 대구 남남서쪽 50㎞ 지점에 이를 때는 시속 31㎞, 오후 3시 충북 청주 남동쪽 60㎞ 지점에 도달할 때는 시속 33㎞로 속도를 높이다가, 이후 진행 방향을 북북서쪽으로 바꾸면서 가뜩이나 느린 속도가 한층 낮아질 전망이다. 기상청 예상에 따르면 오후 6시 청주 북동쪽 40㎞ 지점일 때 시속 26㎞, 오후 9시 서울 동남동쪽 30㎞ 지점일 때 속도가 24㎞로 떨어지고, 자정쯤 서울 북쪽 40㎞ 지점에 이르렀을 땐 시속 19㎞까지 느려질 전망이다. 북한에 들어서는 11일 새벽에는 시속 15㎞ 내외를 유지할 전망이다.
카눈이 '느림보' 행보를 보이게 된 요인으로 일각에서는 또 다른 태풍 란을 지목한다. 란은 8일 오전 9시 일본 도쿄 남동쪽 약 1,500㎞ 해상에서 발생했는데, 중국으로 향하다가 티베트고기압에 막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던 카눈이 일본 규슈 남쪽에서 다시 란의 영향을 받아 잠시 주춤하다가 한반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진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접한 태풍 간 상호작용으로 태풍의 특성을 설명하는 학설이 후지와라 효과다. 일본 기상학자 후지와라 사쿠헤이(1884~1950)가 1921년 주창한 것으로, 태풍 간 거리가 1,000km 정도로 인접할 경우 서로의 진로와 세력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일컫는다. 다만 후지와라 효과는 기상학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아니다. 기상분석이 고도화되면서 태풍의 진로와 세력에 복합적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정설이 되면서 현재는 일부 학자들만 인용하는 분위기다.
카눈이 란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은 카눈의 느린 속도가 후지와라 효과로 볼 여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반 센터장은 이날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카눈이 후지와라 효과 영향으로 중국으로 가려고 하다가, 서쪽 제트기류에 막혀 중국 쪽으로 못 가면서 속도가 늦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반면 박중환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지난 8일 브리핑에서 "란이 발달했지만 카눈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후지와라 효과 같은 상호작용은 낮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상청은 태풍 주변에 형성된 대기 흐름을 뜻하는 '지향류'가 약한 점을 카눈 저속 이동의 주요인으로 보고 있다. 통상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은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를 따라 남서에서 북동으로 빠르게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북태평양고기압이 우리나라 동쪽에 떨어져 있는 등 태풍 경로에 영향을 줄 만한 지배 기단이 한반도 주변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