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이 일어난다. 서울이 뒤집힌다. 모든 건물이 넘어지나 언덕배기 황궁아파트만 홀로 그대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살인적인 추위가 살을 파고든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황궁아파트로 몰린다. 입주자들은 의견이 갈린다. 공생할 것인가, 자신들만 살아갈 것인가. 논쟁은 예상된 결론으로 이어진다. 화재 사건에서 영웅적인 행동을 한 영탁(이병헌)이 입주자 대표로 뽑히고, “바퀴벌레” 같은 외부인들을 몰아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시작부터 집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직설적으로 나타낸다. 압도적인 재테크 수단이며 신분을 상징하고 계급을 가르는 기호인 아파트에 대한 생각들이 영화 전반에 반영된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육교 하나 건너는 데 23년” 걸리는 사회가 ‘리셋’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포개지면서 이야기가 꾸려진다. 제작비 200억 원가량이 투입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밀수’ ‘비공식작전’ ‘더 문’(상영 중)과 더불어 올여름 한국 영화 빅 4로 꼽힌다.
주요 등장인물은 영탁과 민성(박서준), 영화(박보영), 금애(김선영)다. 소시민 영탁은 뒤집힌 세상에서 급속도로 권력자가 된다. 공무원 민성은 가족을 위해 영탁에게 충성한다. 민성의 아내인 간호사 영화는 입주민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반감을 품는다. 아파트 부녀회장 금애는 현실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영화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충돌하는 사연을 에너지로 삼아 이야기를 전진시킨다.
영화에는 바둑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은 외부인들을 쫓아낼지 여부를 투표할 때 바둑알을 쓴다. 영탁이 자신을 속인 인물과 몸싸움을 펼칠 때 바둑판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가 빚어진다. 바둑은 ‘집 싸움’으로 승부를 내는 놀이다. 영화는 집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그려내며 지금 한국사회를 응축해낸다.
집은 누구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남다른 사연을 하나쯤 지녔을 만한 대상이다. 영화는 보편적인 소재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다루다 보니 파격적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주목할 점은 연출이다. 막대한 돈이 들어간 대작 영화이나 상업성과 대중성만 앞세우지 않는다. 사회 비판적 시각과 더불어 감독 자신만의 영화적 인장을 새기려는 야심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그러진 영웅’ 영탁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 영탁의 정체가 밝혀질 때 사용되는 플래시백 등이 인상적이다.
독립영화 ‘잉투기’(2013)로 주목받고 ‘가려진 시간들’(2016)로 호평받은 엄태화 감독이 연출했다. 사실감을 위해 아파트 모양 3층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서울이 대지진으로 큰 파도처럼 들썩이다 파괴되는 장면, 폐허가 된 시가지 등이 볼거리로서의 역할을 하며 우리 사회 내면 속 디스토피아를 은유해낸다.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 ‘유쾌한 이웃’을 밑그림 삼았다. 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