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살해할 마음은 없었어요. 심심해서 장난친 거예요.”(경기 하남시 중학생)
“술 취해 장난 삼아 올렸습니다.”(부산 20대 해군 일병)
“전날 게임에서 알게 된 친구가 욕한 것에 화가 나 그랬습니다.”(경기 용인시 10대)
‘살인예고’ 글이 마치 전염병처럼 창궐해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다. 거리에 장갑차를 깔고,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검경 수장의 으름장에도 도통 줄지 않는다. 한 명 잡아들이면, 두 건의 범행 예고가 생겨나는 식이다.
벌써 경찰에 붙잡힌 살인예고 글 작성자만 54명. 이들 상당수가 10대, 20대였다. 협박범들은 경찰 조사에서 입이라도 맞춘 듯 “장난으로 그랬다”고 답해 충격을 더하고 있다. 방아쇠는 지난달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이 당겼다. 하지만 관심을 갈구하는 영웅심리의 발현과, “절대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젊은 층의 안일함이 그릇된 사회 풍토를 낳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6일 오후 6시 기준 살인예고 글 작성자 54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글 게시 경위 및 범죄 혐의점을 조사하는 한편, 나머지 협박 게시물도 인터넷주소(IP) 추적 등 끝까지 수사해 전원 검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경찰 관계자는 “전국의 사이버수사 역량을 총동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괴이할 정도로 줄지 않는 게시물 숫자다. 경찰이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하고 하루 만에 36명을 추가 검거하는 등 수사력을 결집하고 있지만, ‘치안 공백’ 의심이 들 만큼 살인 협박 글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제발 좀 자제해 달라”는 윤희근 경찰청장의 읍소에도 쉽게 수그러들 분위기가 아니다.
주목할 점은 검거된 글 작성자의 상당수가 중ㆍ고교생과 20대라는 사실이다. 경찰은 전날 “인천 계양역에서 20명을 죽이겠다”고 한 10대 남성을 자택에서 체포했고, “14일 모 중학교에서 칼부림 예고”라고 쓴 남자 중학생도 검거했다. 강원 영월군에선 17세 청소년이 원주역 흉기난동을 예고했는데, 경찰 조사 결과 본인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보하는 자작극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원인을 콕 집어 단정할 순 없다. 다만 아직 사회 규범의 틀에 갇히지 않은 젊은 세대가 일종의 영웅심리에 빠져 범죄를 놀이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부정적 관심이라도 인정받기를 원하는 신세대 특성이 범죄 욕구로 확장됐을 거란 의미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범죄 이력이 없어 공권력과 처벌 강도를 모르는 청소년이 많다”며 “‘호기심에서 한 거니 처벌은 가볍겠지’ 하는 낙관적 편향이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10대 사이에 널리 퍼진 “가상사설망(VPN)을 사용하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는 부정확한 통념도 영향을 미쳤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추적이 어렵다는 VPN ‘토르’도 익명화 기법을 써서 어려울 뿐이지, 국제공조를 통해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하다”면서 검거를 시간 문제로 봤다.
신림동 사건이 잠재적 범죄 욕구를 분출하는 촉매제가 됐다는 해석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신림동 흉기난동이 평소 내재된 불만과 정서적인 불쾌감을 표출하는 활성탄 역할을 한 것”이라며 새로운 위협의 등장으로 진단했다.
실제 낮은 처벌 수위는 장난을 빙자한 협박 테러를 양산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수사당국은 통상 살인예고 행위자에게 협박ㆍ특수협박 혐의를 적용해왔다. 협박죄 법정형은 3년 이하, 특수협박은 7년 이하 징역이지만 재판에선 벌금형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검경은 이날 살인예고 글에 대한 강력 대응 방침을 내놨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긴급회의 전 윤 청장과 통화해 긴밀한 검경 협조도 약속했다. 이 총장은 “살인예고 글 게시자의 구속수사와 ‘살인예비죄’ 적용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검경 수장의 공언 직후 경북경찰청은 2일 온라인 채팅방에 살인예고 글을 올린 30대 남성에게 살인예비 혐의를 첫 적용해 구속 송치했다.
그러나 실효성을 담보할지는 미지수다. 이 죄목은 형량(징역 10년 이하)이 협박 혐의보다 훨씬 높지만, 범행을 위한 도구 구입 등 실질적 위험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불특정 다수에게 불안감을 주는 정보통신망에서의 살인예고 글을 가중처벌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