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기대 수명에 따라 비례적으로 투표하게 해야 한다”는 취지의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의 발언은 노인 비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의 말마따나 어떤 상황에선 합리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1965년생인 김 위원장이 10년쯤 뒤에 이 발언을 다시 꺼내 진지한 논의를 했으면 한다. 그 자신이 노인이 됐을 때 말이다.
김 위원장의 아들이 언급했다는 ‘잔여 기대수명 비례 투표’는 급진 좌파 그룹에서 이미 제기된 주장이다. 국내에도 번역된 ‘21세기 기본소득’의 저자이자 기본소득 운동의 국제적 주창자로 널리 알려진 벨기에 정치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1990년대 후반에 쓴 논문에서 세대 간 정의와 형평성을 명분으로 선거 개혁 방안을 주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잔여 기대 수명에 비례해 투표권을 차등 배분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만 60세 이하 유권자에게 투표권을 1표 더 주거나 만 18세 유권자의 투표에 2배의 가중 가치를 부여하고 매년 1%씩 가치를 경감시키는 식이다. 다만 그는 이런 주장의 전제로 4가지를 가정하는데, 고령화 추세가 가속화하고 기존의 사회경제적 제도 유지가 미래 세대에게 중대한 폐해를 초래하는 경우 등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평등선거 원칙을 어기기 때문에 정당성 자체를 논의하기 어렵지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배경은 우리 사회도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 유권자들의 단기적 이해만 대변하는 ‘노인 포퓰리즘’이 득세할 경우 기후위기, 연금 부담, 환경파괴 등의 문제가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미래 세대에게 전가돼 세대 간 불평등 문제가 전면화할 수 있다. 정치가 이를 조정해야 하지만, 유권자 수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젊은 세대에겐 현행 선거 제도는 기울어진 운동장일 뿐이다. 파레이스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보면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결을 위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혜택이란 ‘차등원칙’을 주장한 존 롤스의 정의론을 선거 제도에 적용시킨 것이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한국도 10여 년 뒤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령 유권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 현재 인구의 18% 수준인 65세 이상 고령층은 2040년에는 35%에 달한다. 바로 김 위원장이 노인이 됐을 때도 그 세대는 정치적 강자다. 내로남불과 포퓰리즘적 성향이 강한 김 위원장 부류가 그때도 ‘개엄‘(개혁의 엄마) 식의 이름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정당을 좌지우지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려고 할 게 눈에 선하다. ‘노인의힘’ ‘더불어노인당’ ‘민주어른당’ 식의 노인 정당이 등장할 가능성도 크다.
바로 그때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소하고 세대 간 정의를 세우기 위해 김 위원장이 ‘잔여 기대 수명 비례 투표’를 진지하게 주장하기를 바란다. 노인 비하가 아니라는 그의 발언의 진의가 비로소 확인될 것이며, 그때는 누구도 노인 비하라고 그를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실현 가능성 자체가 없다. 이를 도입하려면 헌법을 고쳐야 하는데, 압도적 다수인 고령층이 동의할 리 없다. 만약 고령층 다수가 이를 동의할 정도로 미래 세대를 배려한다면 노인 포퓰리즘을 우려해 굳이 선거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없더라도 향후 득세할 노인 포퓰리즘을 견제하고, 세대 간 정의 담론을 확산시키는 차원에서 김 위원장의 발언은 박제해 둘 필요가 있다. 10여 년 뒤에도 김 위원장 부류가 내로남불식 정치 행태를 계속할 경우 이를 추궁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