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나이를 다채롭게 먹었다.
연초에는 떡국과 함께 한 살을 먹었고 6월부터는 만 나이로 계산한다기에 잽싸게 두 살을 뺐다가 몇 달 뒤 생일이 지나면 또 한 살을 먹는다. 한 해 사이에 이렇게 부지런히 나이 먹은 탓에 나이 듦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든다’니, 또 나이를 ‘먹는다’니, 실로 나에게 그만큼 들어찬 게 있었던가? 물론 나이야 노력하지 않아도 쌓인다지만, 그래도 속 빈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 매해 스스로를 점검한다. 나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괜찮은 어른이 되고 있나? 이제 고작 서른 즈음일 뿐인데도 도통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희귀한 좋은 어른과 그렇지 못한 무수히 많은 어른들을 만나면서 점점 커졌다. 일상의 어른들은 대체로 청년을 기특해하는 듯하면서도 그들의 목소리에는 그다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일을 할 때도 큰 기대 없이 단순 보조 업무나 힘쓰는 일, 머릿수 채우는 용도로 활용하기 일쑤였으며 “요오~즘 것들”, “MZ세대”라는 말로 탓하거나 조롱하느라 청년의 성장은 뒷전이었다. 내가 이렇게 청년 이야기에 열 올리는 건(물론 청년세대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첫 일 경험을 ‘청년문제’를 다루는 시민사회단체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청년들이 나이와 경험의 위계를 내려놓고 청년세대의 문제와 고민을 함께 나눴다. 그 목소리와 의지는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서울시와의 거버넌스를 통해 청년수당, 희망두배 청년통장, 청년공간 등 청년정책으로 거듭났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청년들이 이런 변화로 시름을 더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이 과정에서 좋은 어른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 어른 중에는 고인이 된 전 서울시장 박원순씨도 있었다.
박 전 시장을 처음 본 것은 ‘서울청년의회’라는 자리를 통해서였다. 그는 진지한 자세와 태도로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계속해서 관심 보이며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워낙 정당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었던지라 그의 말이 평범한 정치인의 입바른 소리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무관심한 많은 어른, 정치인들 사이에서 한줄기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남성과함께하는페미니즘 활동을 하면서도 그의 이름을 듣는 날이 많았다. 그는 남성이면서도 페미니스트로 자처하며 여성운동계와 함께했고, 낯설었던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수많은 여성운동가 선배들이 그를 동료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어른이자 남성으로 페미니즘 활동을 이어가야겠다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바람과 다짐은 2020년 여름, 그의 성희롱 사건과 이어진 사망으로 산산조각 났다.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고 나 또한 복잡한 마음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일련의 사태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드는 슬픈 마음이 죄스러웠다. 그렇게 방황하는 사이, 어떤 이들은 그저 모른 체하며 추모했고, 또 어떤 이들은 좋은 사람을 잃었다며 피해자를 탓하고 의심했다. 그렇게 혼란 속에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국가인권위원회는 5개월이 걸린 조사 끝에 박원순 전 시장 사건이 성희롱이 맞다고 판단했으며 서울행정법원에서도 인권위의 결정을 인정하며 박원순 전 시장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판단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끝끝내 박원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이해 없이 도리어 피해자를 탓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피해자다움’이라는 잣대로 사고하면서 해당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다른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끝없는 2차 피해를 만들어내고 있다. 게다가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감수성으로 피해자다움과 2차 피해를 양산하는 말과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심지어 서울에서 후원자 시사회를 기획, 진행하려 하고 있다.
성폭력 예방교육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성폭력 사안을 접하고 성폭력 가해자 재범방지교육을 다니며 배웠다.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들은 없고, 그런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던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미투 운동이 남긴 교훈이 무엇이었나.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에 성역은 없다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우리가 진정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더 성숙하게 나이 들어가는 존재라면, 눈감고 귀 닫지 말고 책임과 미래를 마주해야 한다.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해지기 위한 방법을 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실마리를 풀었어야 할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가해자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곧 회복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나눠 질 수 있다.
“왜 진작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럼 왜 평소에 친절하게 굴었어?”, “잘 웃던데 정말 피해자 맞아?” 이런 질문을 가장한 말들이 피해자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전가한다. 피해자는 행복할 수 없는,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한 번이라도 사회생활을 해봤다면, 중국집에서 직장 상사가 짜장면을 고를 때 홀로 다른 메뉴를 고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리 없다. 하물며 소규모 직장의 일터를 떠난 식사시간에도 권력과 위력이 생생히 유지되는데, 중장년 남성과 청년 여성, 유력 정치인과 비서라는 권력관계라면 어떨까? ‘갑질’이라는 말이 흔해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권력 남용 문제가 심각하고 만연함에도 유난히 성폭력 사건 앞에서는 그 권력에 대한 사고를 멈추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면밀하게 그 권력을 관찰하고 드러내려 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비롯해 미국의 프린스턴, 하버드, 예일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 간 연애를 금지하는 교칙이 있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위계(位階)가 사적 관계에서도 권력 불균형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그 방법의 찬반 여부를 떠나, 이 사회가 위력에 의한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합리적 피해자 관점 역시 필요하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피해자에게 모든 역할과 책임, 부담을 떠넘기는 일일 뿐이다. 합리적 피해자 관점은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중장년 남성의 시점이 아니라, 단순한 부탁에도 거절이 쉽지 않은 사회 초년생, 성인지감수성이 당연하고 기본적인 청년세대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부터도 올챙이 적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지라 그것이 참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젊은이는 늙어본 적 없으나, 어른들은 젊었던 적 있으니, 젊은이들의 마음과 목소리에 자리를 내어주는 게 책임을 다하는 어른의 역할이라고 배웠다.
그럼에도 기어코 그 다큐를 봐야겠다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지하던 박원순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약자 옆에 선 인권 변호사? 사회 변화를 이끄는 시민사회운동가? 혁신을 말하는 정치인? 어떤 쪽이든 당신이 박원순을 통해 꿈꾸었던 세상은 개인의 과오를 지우고 숭배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한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내가 박원순을 통해 지향했던 세상은 더 많은 남성이 함께 페미니즘을 접하고 실천하며 성평등을 실현하는 곳이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한 세상임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기 주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런 세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그 기대는 무너져버렸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향했던 세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잘못과 한계를 인정하고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든 책임을 나눠서 지며 미래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세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더 이상 우리 주변 공동체에서 이런 문제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일상을 자유로이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나이를 떠나 좋은 어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책 한 구절을 남긴다.
위 글은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잔디씨의 책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에서 나온 이야기다. 부디 이 글을 읽은 우리가 함께 부끄럽고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나아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