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학부모들의 극성스러운 관심이 교육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교권 위기에 관한 최근 기사에 달린 댓글이, 아니다. 1993년 4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중학교 교사가 ‘교육위기 더 이상 방관해서 되나’라는 제목으로 투고한 글이다. 무례한 보호자는 30년 전에도 있었다. 학생인권조례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교권의 추락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절망감과 참담감을 금할 수 없다.” 3만 명이 모인 지난주 추모집회 현장에서 나온 통곡이, 아니다. 1998년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사설 ‘끝없이 추락하는 교권’의 내용이다. 1970~1980년대에도 이런 걱정은 존재했다. 다만 그림자 밟혔다고 화내면서 ‘스승을 존중하라’는 정도였다면 90년대부터는 위험으로부터 ‘교사를 보호하라’는 흐름으로 변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학력이 높아지면서 중산층이 많아졌고, 입시경쟁의 강도만큼 사교육의 효능이 커지면서 공교육 종사자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도 늘었기 때문일 거다. 사설은 교사를 와해시키는 교육당국의 조치를 꼬집으며 끝맺는다. 담임 선택제, 교사 상호평가제, 참스승인증제, 능력급제 등이 개혁이라는 기치로 도입되었는데 이게 맘에 안 들면 교사를 무시하라는 신호가 되었음을 인정하자는 거다.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는 그 이후의 학교가 ‘빠르고 완벽하게’ 붕괴되었음을 증명한다. 10년 전 출간되었지만 교사의 소진과 고립의 이유를 현장의 목소리로 짚어내는 저자의 혜안은 진상 부모 사례만 나열되다가 이게 다 인권교육의 결과라는 황당한 분석이 난무하는 작금의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보게끔 한다. 모두가, 모든 걸 평가받는 시대에 부모는 불안하다. 그러니 교사의 조언을 자녀 역량에 대한 부정으로 느낀다(117쪽). 학생의 문제는 곧 엄마의 문제라는 인식도 만연하다(124쪽). 이 강박 속에서 보호자는 “당신이 내 아이 책임질 거냐?”면서 교사의 영역 안으로 침투한다. 90년대보다 더 과감하게.
하지만 ‘성과’로 공교육을 평가하는 게 교육개혁이었던 환경 안에서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평가가 빈번해지면, 반드시 공동체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가야 할 문제가 발생해도 “능력 있는 교사라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주술만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교사 ‘권리’가 침해될수록 교사 ‘역량’이 맹목적으로 강조되는 무서운 덫 앞에서 교사는 자기 혁신의 강박에 시달린다(247쪽). 교무실 안이 무한책임을 진 이들과 무책임한 아무개로 구분되는 건 당연했다(159쪽).
지금 ‘부모가 제대로 가르쳐라!’,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라는 말이 지나치게 분출되고 있다. 과연 교사를 보호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질까? 부모 역할에 집착할수록, 꼼꼼한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니 어쩌고의 이야기에 심취할수록, 교사도 자신이 관리하겠다는 악성 민원인이 되는 것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