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세종의 600년 전 기우제

입력
2023.07.31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하는데, 흔히 유교의 오랜 유산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공자, 맹자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동중서가 황제의 강력한 통치권에 명분을 주기 위해 체계화한 주장일 뿐이다. 현대 학자들은 그래서 동중서를 이성적이던 유가 정신을 원시종교로 회귀시킨 주범으로 지목한다.

□한민족 최고 통치자 세종대왕도 ‘천재지변은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믿었을까. 물론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인감응을 부정하는 언급이 자주 나온다. 권채(權採)라는 신하가 “어떤 좋지 못한 징조가 감응한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갖다 붙인 사리에 맞지 않는 언론(言論)”이라고 주장했을 때, 세종은 “한나라와 당(唐)나라의 여러 선비들이 다 천재지이설(天災地異說)에 빠져서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은 내 채택(採擇)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종은 그 누구보다 기우제를 열심히 지냈다. 정확히 600년 전 요맘때(세종 5년·1423년 7월)도 한양의 종묘·사직·북교 세 곳에서 동시에 기우제를 지냈다. 특히 북교(北郊)에서 지낸 제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책망한다. “나는 불선(不善)한 사람으로서 외람히 군사가 되었으므로 (중략) 근년에 와서 한재와 흉년이 서로 잇달아서 진휼(賑恤)의 비용으로 국고와 민간이 텅 비었습니다 (중략) 인정(人情)과 신감(神鑑)이 감응(感應)하고 교통하여 비를 흡족하게 내리어, 길이 물질이 풍성한 데 이르도록 하소서.”

□올여름 호우와 수해로 국민들은 몇몇 정치인과 광역단체장들의 ‘똑똑한’ 민낯을 확인했다. "현장에 일찍 갔어도 바뀔 것 없다", "공직자의 주말 골프는 자유"라는 언급 등이었다. 이치로만 따지면 틀린 말이 아니지만, 표를 몰아줬던 국민들은 배신당한 느낌이다. 위기에 힘들어하는 동료를 북돋아주는 다정함 대신, 각자도생의 냉정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중서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종이 ‘천인감응설’을 믿는 양 행세한 건, 정치의 출발은 백성 마음부터 보듬는 다정함이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