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지난달 혼합현실(MR) 헤드셋 '프로비전'을 공개하면서 정보통신(IT) 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애플이 관련 기술에 관심을 보여온 것만 10년 가까이 되는 만큼 그동안 쌓인 기술을 한데 모은 제품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아이폰, 에어팟, 애플워치 등 애플이 내놓았던 IT 기기들은 곧바로 업계의 트렌드가 됐다. 프로비전 역시 MR 시대를 열 제품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MR이란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혼합된 것을 의미한다. 현실 공간을 완전히 차단해 몰입도가 높은 콘텐츠 환경을 제공하는 VR의 장점과 현실 공간 위에 가상의 이미지를 덧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AR의 장점을 결합한 형태다.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을 섞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몰입감과 상호 작용이라는 특징을 융합했다.
사실 MR 관련 제품이 시중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17년과 2019년 '홀로렌즈'라는 안경 형태의 MR 제품을 내놓았으며, 메타 역시 6월 '메타 퀘스트3'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감과 달리 아직까지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금까지 시장을 이끄는 업체는 중국의 '엑스리얼'이다. 엑스리얼은 지난해 선글라스 모형의 MR 안경 '엑스리얼 에어'를 출시해 전 세계에서 10만 대 이상 판매했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엑스리얼은 지난해 MR 안경 시장에서 37%의 점유율로 1위를 기록했다.
엑스리얼이 최근 출시한 무선 연결 허브 '빔'은 MR 기기의 사용 환경을 더 좋게 만들어줬다. 빔은 손바닥 크기의 단말기로 엑스리얼 에어와 연동해 사용 가능하다. 허브 역할을 하는 기기로 무선으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나 애플 아이폰과 연결해주고 화면의 크기를 조절하거나 다양한 모드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엑스리얼 측으로부터 제품을 대여해 일주일 동안 직접 체험해보니 화면 크기에 구애받지 않고 모바일, 개인용 컴퓨터(PC)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제품 간 연결은 어렵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나 애플 아이폰은 와이파이를 통해 무선 연결이 가능하고 PC는 빔과 엑스리얼 에어를 유선으로 연결하고 전원을 켜면 화면에 '다른 기기와 연결' 안내가 뜬다. 엑스박스 시리즈 X·S, 닌텐도 스위치, 플레이스테이션4 등 게임기는 선으로 이을 수 있다.
갤럭시 스마트폰 안에서 화면을 전송하는 '스마트뷰'를 실행하면 안경에 내 스마트폰 화면이 등장한다. 빔을 통해 화면의 크기나 위치 등을 조절할 수 있는데 △특정 위치에 화면을 고정할 수 있는 화면 고정 모드 △화면을 구석에 놓아주는 사이드뷰 모드 △얼굴 움직임을 완벽하게 따라가는 흔들림 방지 기능 중 고르면 된다.
안경 모양의 MR 기기는 작은 얼굴 움직임에도 화면이 흔들릴 경우 사용자가 멀미나 어지럼증을 호소할 수 있다. 엑스리얼은 화면을 짐벌 카메라로 촬영하는 기술을 접목, 짧은 움직임과 큰 움직임을 나눠 화면이 얼굴을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자동차가 흔들리는 정도에서는 화면이 움직이지 않아 콘텐츠를 즐기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사이드뷰 모드는 여러 화면을 동시에 띄워 놓고 업무를 할 때 도움을 줬다. 가령 스마트폰 화면을 안경 화면 한쪽에 보내두고, 나머지 시선은 실제 PC에 둔 채로 업무를 하는 식이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도 폰과 PC 화면을 같이 두고 일할 수 있어 익숙해지면 업무 효율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화면 고정 모드는 누워서 대형 화면으로 스마트폰 콘텐츠를 볼 때 안성맞춤이었다. 엑스리얼 에어의 안경대 쪽에는 작은 스피커가 담겨 있다. 안경을 쓰는 것만으로 바로 눈앞의 최대 130인치의 대화면을 감상할 수 있다. 엑스리얼 에어의 무게는 79g 수준으로 크게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나 PC에서 MR 기기로 화면을 내보내는 구조다 보니 4K 등 고화질 영상의 경우 다소 끊기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TV 대비 화질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엑스리얼 측은 빔 자체에 동영상서비스(OTT) 앱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스마트폰 없이도 빔만으로 안경에 화면을 전송하는 것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선글라스의 형태지만 아직까지 이런 기기가 대중화에 성공하지 못한 만큼 이를 밖에서 쓰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만큼 화면 위쪽을 바라볼 때 시선만 움직여야 하는데 고개를 자꾸 들다 보니 화면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도 반복됐다. 무게가 가볍다고 하지만 착용한 지 한 시간이 넘어가니 콧등에 상당한 부담이 느껴졌다. 또 안경 형태의 기기인 만큼 안경 착용자의 경우 콘택트렌즈를 끼거나 동봉된 렌즈에 도수를 넣어 기기에 따로 붙이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기술 발전에 따라 안경 형태의 MR 기기가 PC, 스마트폰에 이어 새로운 IT 폼팩터(기기의 물리적 외형)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 애플도 프로비전을 내놓으면서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는 용어를 썼다. 의자에 앉아서 PC를 하거나 손바닥 위 아이폰을 두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가상 공간에 화면을 띄우고 콘텐츠를 보거나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비전이다. 결국 안경 모양의 MR 기기가 스마트폰, 컴퓨터, TV, 게임기를 모두 더한 새로운 기기가 된다는 뜻이다.
빔은 한 번 완전 충전을 하면 최대 네 시간 쓸 수 있고 대기 상태로는 일주일 이상 유지된다. 충전을 하는 동시에 사용도 가능하며 27와트 고속 충전을 지원한다. 야외에서는 보조 배터리로 활용할 수도 있다. 출고가는 15만9,000원으로 정식 출시는 8월 10일부터다. 이와 연동해 사용하는 안경 형태의 엑스리얼 에어는 49만8,000원에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