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에서 금한 일을 특별히 허가하여 주던 일’. 물금(勿禁)의 사전적 정의다. 경남 양산 물금읍의 유래와 다르지 않다. 이 지역은 옛날 신라와 가락국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당시 두 나라의 관리가 물금에 상주하며 왕래하던 사람과 물품을 조사하고 검문했다고 한다. 검색을 강화하면 백성들의 불편이 가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양국이 이곳에서만은 서로 ‘금하지 말자’고 합의해 물금이라 부르게 됐다는 얘기다. 오래전부터 사람과 물산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소통과 교류의 상징적인 장소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수해가 없도록 ‘물을 금한다’는 의미로 물금이라 부르게 됐다거나 낙동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 ‘물고미(勿古味)’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물굽이의 이두식 표기다. 어느 것 하나 딱 부러지지 않지만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다.
바다를 코앞에 두고 한껏 넓어진 700리 낙동강이 유유히 휘감아 돌며 물굽이 양쪽에 드넓은 고수부지가 형성됐다. 큰물 때만 잠기는 하천 언저리는 이제 웬만한 홍수에도 끄덕 없는 대규모 공원으로 변했다. 길이 4km, 폭 600m에 이르는 황산공원이다.
‘황산’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양산의 옛 지명이다. 1,900여 년 전부터 일대 낙동강은 황산하(黃山河) 또는 황산진구(黃山津口)로 불렸다. 탈해이사금 21년(77)에 벌어진 ‘황산진구 전투’에서 신라는 가야를 크게 무찔렀다. 황산강을 봉쇄해 물길로 연결되는 가야연맹체의 수운을 차단하고, 해상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막으려는 포석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투에서 1,000여 명의 가야 병사가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중심으로 기술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가야로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두 나라가 치열하게 다투었던 물금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육로의 거점으로 발전한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연결되는 영남대로의 주요 경유지로 관원들이 묵어 가던 황산역(黃山驛)이 설치된다. 안타깝게도 그 흔적은 사라지고 현재는 어수선한 공터에 안내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놓이며 물금은 육로와 수로가 함께 발달한 교통의 요충으로 자리를 굳혔고, 1990년대 중반 신도시가 조성되며 겉모습도 완전히 달라졌다. 현재 양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약 12만 명이 물금에 살고 있다.
낙동강 지류인 양산천 물길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쭉하게 형성된 도시는 이곳 황산공원에 이르러 숨통이 확 트인다. 공원이 워낙 넓어 걸어서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물금지하차도 부근의 대여 업소에서 자전거를 빌리면 편리하다. 물금역에서 양산시 공공 자전거를 빌려도 된다.
황산공원에는 넓은 잔디밭에 여러 갈래의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옛 물류의 중심이었던 황산진으로 추정되는 물금나루터는 현재 ‘낙동강 생태탐방선 선착장’으로 쓰인다. 30명 정원의 유람선이 부산 을숙도와 김해 대동 등으로 운항한다. 전담 해설사가 동승해 낙동강의 역사와 생태계에 대해 설명해주는 에코투어다. 자세한 경유지와 탑승지는 낙동강생태탐방선 홈페이지(bto.or.kr/ec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약 200m 하류에는 월당나루터가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양산과 김해를 오가는 통학생과 장꾼들이 이용하던 나룻배가 다녔다고 한다. 현재는 한적한 나루터 위아래로 산책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황산공원 상류 물금취수장에서 원동면 경계 지점까지는 산자락이 강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낭떠러지다. 그 절벽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영남대로는 황산잔도로 불렸다. 나무를 선반처럼 매어 만든 길로, 영남대로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혔다. 10여 년 전 강 위로 자전거길이 놓이며 현재는 ‘황산강베랑길’로 불리고 있다. '베랑'은 벼랑을 뜻하는 지역 말이다. 산기슭에는 경부선 철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초입의 황산잔로비는 1694년 권성구 군수가 탄해 스님과 별장 김효의를 시켜 깊은 곳을 메우고 험한 곳을 깎아 도로를 평탄하게 한 공을 기리고 있다. 목재 덱 중간에는 1871년 동래부사 정현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불망비와 고종 때 선비 정임교가 벗들과 시를 읊던 경파대(鏡波坮)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과 빼어난 경치는 포기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약 600m 구간 수상 덱을 거쳐 화제천이 흘러드는 화제마을 앞에 이르면 동강 난 걸 이어 붙인 ‘화제석교비’가 있다. 잦은 수해로 흙과 나무로 만든 다리(土橋)가 반복해 무너지자 영조 15년(1739)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虹霓石橋)를 만들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바로 옆에는 ‘수라도 문학현장’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969년 발표한 김정환의 소설 ‘수라도’에 그려진 당시 풍광을 회고하고 있다. 소설에서 황산강베랑길의 다른 이름인 ‘황산베리끝’은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 (중략) 구경꾼까지 합치면 줄잡아 오륙십 명 가까운 사람들이 외줄로 사뭇 늘어섰다”고 묘사하고 있다.
베랑길 바로 위 언덕 끝에는 전망 좋은 바위에 임경대(臨鏡臺) 누각이 세워져 있다. 신라 말기 고운 최치원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 전해진다. 물금읍에서 원동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바로 옆이어서 지금은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그 옛날엔 길을 내기 어려운 벼랑 끝이었다.
주차장에서 언덕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면 아담하면서도 단정한 솔숲과 대숲을 지난다. 초입의 작은 공원에 이곳의 정취를 읊은 최치원의 시비가 있다. 원래 황산강 절벽에 새겨져 있었지만 이제 눈으로 확인이 어렵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는 시다.
“안개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烟巒簇簇水溶溶), 물속에 비친 인가는 푸른 봉우리에 마주 섰네(鏡裏人家對碧峯).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何處孤帆飽風去),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 없네(瞥然飛鳥杳無踨).”
고운의 시 외에 이곳을 다녀간 당대 문인들의 시도 수두룩하다. 양산에서 이름깨나 날린 선비와 관리는 빠지지 않고 출석 도장을 찍은 듯하다.
공원에서 몇 발짝만 디디면 바로 임경대 누각이 보인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장구하게 흘러 온 낙동강 물길이 가득 들어찬다. 누대에 오르면 두 팔을 벌려도 모자랄 정도로 넓어진 강줄기가 아찔하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강 오른쪽은 양산 원동면, 왼쪽은 김해 상동면이다. 경치 좋은 물가에 전원주택이 들어섰고, 먼 골짜기에는 소규모 공장이 제멋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지형은 최치원이 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현대식 구조물만 제거하고 보면 그 정취도 변함없다. 계속된 폭우에 황톳빛이 가득하지만 넓고 깊고 그윽하다.
서울에 경리단길이 있다면 물금엔 서리단길이 있다. 양산을 여행하며 맛집이나 분위기 있는 카페를 찾는다면 크게 실패가 없는 곳이다. 오래된 도심 골목을 따라 개성 있는 술집과 식당, 카페가 들어선 모양이 비슷하다.
왜 하필 ‘서리단길’일까. 젊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주민들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서리단길 중간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일대는 조선시대 역참이었던 황산역을 비롯해 경부선 물금역과 물금읍사무소, 황산시장 등의 시설이 몰려 있는 지역의 중심이었다. 1936년부터 물금리 서쪽을 서부마을로 부르게 되는데 서리단길의 유래로 추정된다.
서리단길은 대도시 ‘핫플레이스’와 비교하면 규모가 소박하고 정겹다. 한쪽 끝은 고층아파트로 막혀 있고, 이와 대조적인 1~2층짜리 오래된 상가 건물이 골목을 따라 약 500m 이어진다. 세월의 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낡은 건물을 개조해 젊은이의 취향에 맞춘 가게들이 속속 들어선 모양새다.
옛 우체국은 메밀요리전문점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전국적으로 꽤 이름난 동파육 전문식당도 자리를 잡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깔끔하게 단장한 케이크전문점과 카페, 술집, 공방, 사진관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기존에 장사하던 가게도 분위기에 맞게 간판을 새로 달았다. 수선집은 예쁜 우체통과 옷걸이로 장식했고, 도배장판 업체는 ‘바르지오’라는 세련된 간판을 내걸었다.
붉은 타일의 주조장 건물에는 하얀 술병에 간결하게 ‘물금막걸리 since 1941’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바로 옆에는 피자가게와 북카페가 자리 잡았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묘하게 조화롭다. 머지않은 과거로 돌아간 듯, 전선이 얽혀 있는 골목에는 지금도 새로운 가게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