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나는 중국 베이징 속 두 곳의 폐허를 매일 오가며 지내고 있었다. 동쪽 지역의 거처에서 기상해 버스에 몸을 싣는다. 동쪽은 국제 중심 상업지구로 변모하기 위해 대대적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이었다. 버스를 타면 여기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듯 도시의 반대편으로 향한다. 시내 중심부 천안문 광장을 지나면 버스는 세월의 풍파 속에 폐허가 된 만리장성 한편에 다다른다.
호텔 프로젝트 현장에서 설계·감독을 하다 보면 해가 만리장성 위로 기울어지고, 나는 다시 반대편 미래의 도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한 해가량 했다. 당시 700년 역사의 거대 도시 북경은 올림픽을 앞두고 온 세계에서 집중될 이목과 관광객들을 기대하며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명품 도시로서의 포장을 대대적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프리츠커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가들이 정부, 민간 프로젝트 할 것 없이 설계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도시 전체가 천지개벽하듯 무수한 랜드마크 프로젝트들이 하나둘씩 위용을 드러냈다. 공항, 오페라하우스, 올림픽 경기장, 마천루, 방송국, 첨단 주상복합, 박물관과 미술관 등 시설물 전반에 걸쳐 이전까지 보지 못하던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동안 다른 도시에 비해 지체됐던 현대화를 한 번에 만회하려는 듯 거센 변화가 중국적인 규모로 진행됐다.
각종 미디어도 매일 유명 건축가의 새 프로젝트를 소개했고, 적지 않은 세계적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러한 랜드마크 경쟁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시큰둥하게 급랭했다. 화려함은 반짝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더 큰 규모의 자본이 매년 더 높고 더 호사스럽고 더 스펙터클한 건축물을 선보이면서 이전 것은 소비되어 잊히고 마는 것이다. 권력이나 거대 자본에 의한 기념비적 건축은 많은 사례가 그러하듯 좀처럼 우리 일상에 녹아들지 못하고 표류할 뿐이다.
요즘 부쩍 그때의 기시감이 든다. 자고 일어나면 각종 SNS와 신문에서 접하는 새로운 서울의 랜드마크 소식들, 국적 불명의 이름을 단 고급 아파트 광고들. 예전 북경의 기억이 슬며시 소환되며 식상함이 몰려온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는 새로운 랜드마크를 소개할 때 해외 유명 도시를 벤치마킹하며 '우리도 이제 ○○처럼'이라고 부연한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볼 때 아직 국내 도시가 부족하고 뒤떨어진다는 의식이 은연중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명 도시들의 랜드마크를 이것저것 모아 놓으면 명품 도시가 된다는 것일까. 어쩌면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개발 시대의 토건 정신이 오늘까지 여전히 우리의 피를 들끓게 해 '빈 땅을 보면 참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랜드마크는 우리말로 '마루지'라고 하는데, 특정 지역의 상징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징이 많은 도시는 좋은 도시가 아니다. 사실 랜드마크는 도시의 역사가 오래된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산 조어다. 이들은 큰 도시를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평지에,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에 만들다 보니 방향 감각이 필요했고, 인공적인 대형 구조물은 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강과 산의 지세가 수려하고 그 사이에 자리한 영역들도 거대하지 않아 인공적 상징물의 역할이 크지 않다. 오히려 점적인 인공물의 랜드마크들보단, 뛰어난 근본들을 보전하고 각 영역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랜드 스페이스'가 K스타일 도시에 더 걸맞지 않을까 한다.
도시의 매력은 랜드마크로 형상화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사건과 행위가 일어나는 집합적인 관계성에 있다. 지금 진행되는 재개발의 고밀도 고층화는 점차 줄어드는 인구에 지속해서 적용이 가능한 모델일까?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보다 높게'는 '보다 싸고 폭넓게 제공될 수 있음'이 돼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