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라윳 짠오차(69) 태국 총리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9년 만이다. 지난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책임을 지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실각하는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임명을 강행한 상원의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어 막후 영향력은 계속될 전망이다.
12일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쁘라윳 총리는 전날 밤늦게 성명을 내고 “정치를 그만두고 소속 정당인 루엄타이쌍찻당(RTSC)에서 탈당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국가 안정과 평화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국내외 많은 장애물을 극복했다”고 자평했다.
쁘라윳 총리는 육군 참모총장이던 2014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5년간 총리를 지낸 뒤 2019년 3월 군부가 주도한 ‘무늬만 총선’에서 총리로 다시 선출됐다. △2020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경제 악화에 따른 민심 이반 등 각종 악재에도 9년간 정권을 지켰다.
쁘라윳 총리는 총선을 앞두고 “패배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배수의 진을 쳐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권력을 연장하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RTSC당이 하원 500석 중 36석을 얻는 참패를 당하면서 정계 은퇴에 내몰렸다.
쁘라윳 총리의 은퇴가 태국의 민주주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총선에서 군주제 개혁과 징병제 폐지 등 파격 공약을 앞세운 진보정당인 전진당이 제1당에 올랐지만 집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젊은 개혁 기수’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가 총리에 취임해 내각을 장악하려면 13일 상·하원 양원 합동 투표에서 전체 750석(상원 250석·하원 500석) 중 과반(376석)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야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312석을 모았지만 64석이 부족하다.
캐스팅보트를 쥔 상원 의원들은 군부가 개헌으로 앉힌 ‘쁘라윳계’이다. 상원 의원들은 투표를 앞두고 “피타가 총리가 될 일은 없다”고 별렀다. 쁘라윳 총리가 은퇴 후에도 이들을 앞세워 정치권에 영향력을 미칠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미국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매트는 "쁘라윳 총리가 이끄는 군부가 전진당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피타 대표가 13일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재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피타 대표 역시 “첫 번째 총리 투표에서 낙선하면 계속 투표하면 된다. 상원 의원들과 공통의 기반을 확보하겠다”며 총리가 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피타 대표의 총리행이 끝내 불발되면 제2당인 푸어타이당이 연정 구성에 나서 총리 후보를 낼 수도 있다. 이 경우 푸어타이당은 전진당과 연합을 계속할지, 군부와 새로 손을 잡아 안정적인 집권을 시도할지 사이에서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