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시간에 ‘하은주춘추전국진한(夏殷周春秋戰國秦漢)’이라 외웠다. 중국 고대 왕조의 순서다. ‘은’이라 외운 까닭은 사마천의 은본기(殷本紀) 때문이리라. 중국 CCTV 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난징대학교 후아샹 교수가 은(殷)은 별명이고 상(商)이 국호라 했다. 덧붙여 은은 중원 동쪽에 있는 오랑캐를 뜻하는 이(夷)와 동의어라 했다. 상족(商族) 부족장인 탕(汤)이 기원전 16세기에 나라를 세우고 ‘박(亳)’에 도읍을 정했다. 지금의 허난성 동쪽 끝 상추(商丘)다.
시내에 고성이 있다. 3,600년 전 흔적은 아니다. 16세기 초 명나라가 귀덕부(歸德府)를 설치하고 성벽을 쌓았다. 호수가 사방을 둘러싼 수중성(水中城)이다. 동서로 1km에 미치지 못하고 남북으로 1.2km가 조금 넘는다. 주민이 거주하는 고성이다. 상족의 시조인 설(契)이 하나라 통치자 우(禹)의 치수를 보좌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봉호를 받았다. 근거지를 자주 이동하던 부족이 정착했다. 상인(商人)이 거주하던 터(丘)가 지명이 됐다. 상족, 상나라, 상인이라 하니 자연스레 상업이 떠오른다. 관련이 있다.
남쪽 성문인 공양문(拱陽門)으로 간다. 태양을 향해 두 손 맞잡고 예의를 표시하는 문이란 뜻이다. 8m 높이의 성벽 위로 깃발이 휘날리고 2층 누각까지 웅장한 기세다. 아치형 대문으로 들어선다. 문 안의 길이가 20m나 되는데, 이 공간을 문동(門洞)이라 한다. 밖목의 너비가 4.45m, 높이가 3.93m다. 안목은 너비 5.05m, 높이 5.12m라 점차 커지는 느낌이다. 동굴을 지나가는 기분이 든다.
주민의 생활공간이라 활기차다. 가게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평범한 고성의 모습이다. '상품대세계'라 적힌 시장이 나온다. 화상(華商)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는 곳이다. 상추에서 설의 6세손으로 7대 부족장이 된 왕해가 태어났다. 사마천이 진(振)이라 기록한 인물이다. 서경에 따르면 소와 말을 길들여 농업을 발전시켰다. 잉여 물품을 수레에 싣고 멀리 떨어진 외부로 가서 교역을 했다.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이었다. 상인이 하는 이상하고도 대단한 일(業)이 됐다. 상족은 점점 강대해졌다. 왕해는 상품, 상인, 상업의 시조가 됐다.
삼상지원(三商之源)이자 화상지도(華商之都)라 한다. 거창한 자부심인데 서민이 살아가는 공간일 따름이다. 상추 지방의 별미인 바이지모(白激饃)를 즉석에서 만들어 판다. 양념 국물에 담긴 고기를 빵에 끼워 넣은 ‘중원의 햄버거’다.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재료로 한다. 고기를 끼운 빵은 중원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육수를 곁들여서 그런지 부드러운 맛이다. 어디선가 쾨쾨한 냄새가 난다. 외국인에게는 ‘똥두부’라 불리는 처우더우푸(臭豆腐)다. 두부 맛이 다 다르듯 처우더우푸도 동네마다 맛과 향이 다르다. 접시에 4개를 담아준다. 양념을 뿌려 먹는데 맛이 고소하다. 냄새만 그럴 뿐 삭히고 살짝 튀긴 맛이 그럴듯하다.
고성은 한적한 편이다. 이동수단인 삼륜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많다. 여유롭게 둘러보다가 간판 하나에 눈길에 간다. 인생종점역(人生終點站)이다. 백세까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말이 적혀 있다. 우주의 섭리를 일깨우는 음양양천지(陰陽兩天地)도 있다. 수의(壽衣)를 파는 점포다. 쌀국수와 마라탕 파는 식당이 보인다. 간판에 꼬부랑글자가 적혀 있다. 무슬림 식당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원에 온 이슬람교도가 방방곡곡에 거주하고 있다. 무슬림 식당의 마라탕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전국 어디서나 실패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마라탕보다 훨씬 맛있다고 장담한다.
북쪽 성문은 공진문(拱辰門)이다. 태양을 담은 남문과 대칭으로 한밤중에 빛나는 북두칠성을 받든다. 정문이라 남문보다 조금 더 크고 높다. 성곽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상(商) 글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경에 상나라 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부른 송가(頌歌)가 나온다. 천명현조강이생상(天命玄鳥降而生商)으로 시작한다. 천명을 받고 새가 내려와 상을 낳았다는 말이다. 사마천도 기록했다. 모친인 간적이 하늘에서 내려온 새의 알을 삼킨 후 아들을 낳았다. 바로 상족의 시조인 설이다.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소리다.
방송에서 후아샹 교수는 새가 바로 봉(鳳)이라 한다. 봉황의 수컷이다. 갑골문에 나오는 봉과 상(商)은 매우 비슷하며 봉에서 상이라는 글자가 창조됐다는 주장이다. 상은 신성한 봉황의 형상을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내는 글자라 해석한다. 성곽 위에 올라가 고성 거리를 바라본다. 수천 년 전 상인의 흔적이 남았을 리 없다. 당시 고성은 아니지만 바람결에 문득 수레를 끌고 가는 상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지명이며 부족의 이름이다. 상업의 땅이다. 약 500년 세월 동안 중원의 통치자 상나라는 여러 번 천도를 단행한다. 후기의 도성으로 갑골문이 출토된 안양으로 간다.
상추에서 황하를 건너 서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져 있다. 안양 시내를 흐르는 환하(洹河) 강변 일대 땅 속에서 갑골문이 발견됐다. 샤오툰촌(小屯村)에 위치한 은허박물원에 도착하니 ‘갑골문발견지’라 쓴 바위가 우뚝 서 있다. 간판은 박물원이지만 은허궁전종묘유적지(殷墟宮殿宗廟遺址)다.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에 은이라 불렀기에 터(墟)와 붙여 은허다. 스스로를 은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갑골문 어디에도 은이라는 글자는 없다. 물론 상은 자주 등장한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잔디밭에 청동기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사모무(司母戊)라 적혀 있다. 높이가 133cm이고 무게가 832.84kg에 이르는 초대형 솥(鼎)이다. 중국 10대 보물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는다. 상나라 23대 통치자 조경이 걸출한 정치가인 어머니 부호를 위해 만든 제기(祭器)다. 약 3,000년 후인 1939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안쪽에 새긴 글자 그대로 유물의 이름이 정해졌다. 50년이 흐른 후 전문가들이 사(司)를 후(后)라 해석했다.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고문에서 사와 후는 하나의 글자였다. 후는 황후라는 논리다. ‘후모무정’이라 명명하고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안양에서 전시할 때는 ‘사모무정’이라 한다. 하나의 솥, 두 개의 이름이다.
뒤쪽에 상사공음(商史跫音) 전시관이 보인다. 상나라 역사의 발자국 소리라는 작명이 재미있다. 은허와 갑골문에 관한 전시로 빼곡하다. 관모와 관복 차림의 왕의영이 보인다. 국자감 제주(교장)로 고문과 금석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말년인 1899년 학질에 걸렸다. 치료를 위해 약재로 애용되던 용골(龍骨)을 구입했다.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가 재료였다. 용골에 무언가 긁힌 자국이 보였다. 전문가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보물이었다. 약재가 골동품이 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이 13만 개에 이른다. 글자도 약 5,000자에 이른다. 상당한 분량은 이미 가루가 돼 사람이 삼키고(呑) 난 후였다. ‘사람들이 상나라 역사를 삼켰다’고 아쉬워한다.
전시관 복도의 벽에 갑골문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자의 뜻과 갑골문 모양을 대조하며 읽어보니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갑골문도 많다. 상중하 3줄로 끝까지 길게 이어진 갑골문 학습장이다. 어떤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지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누구 생각인지 모르나 매 글자마다 감상을 적었다. 고시를 인용하기도 하는데 약간 억지스러워 보인다. 감칠맛을 풍기는 비유도 있다.
모(母)에 대한 감상평은 ‘자애로운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로 먼 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깁네’로 시작하는 당나라 시인 맹교의 유자음(游子吟)을 인용했다. 가슴 부위에 두 점을 표시하고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모양이다. 애(愛)는 ‘두 사람이 서로 지원해 앞을 향해 똑바로 나간다’는 모양이다. 원래 원조(援助)의 뜻이다. 현대의 사랑과 좀 다르다. 미(美)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원정(怨情)이 등장한다. ‘미인이 주렴을 걷고는 줄곧 이마를 찌푸리고 있네’라는 의미의 미인권주렴(美人卷珠簾), 심좌빈아미(深坐顰蛾眉)이다. 머리에 꿩 깃털을 꽂은 모양이다. 모든 갑골문에 시를 읊고 있지는 않다. 긴 복도를 설마 시구로 채우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은 기우였다.
1937년 처음으로 궁전종묘터가 발굴됐다. 지금까지 54곳이 세상에 나왔다. 후침과 조정, 묘원을 갑을병으로 나누고 숫자까지 있어 헷갈린다. 종묘의 제사 공간이 발굴됐다. 세월만큼이나 깊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땅 속 갱도를 유리로 덮어 안쪽이 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앉은 자세의 유골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정말 당시 사람이란 말인가? 다행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여서 유골의 시선과 마주치지는 않는다. 고고학자라면 친근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갑골문은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이다. 거북의 껍질과 동물의 뼈에 새긴 글자다. 상나라는 점복(占卜)의 나라였다. 삼라만상을 모두 점을 치고 해석한 그대로 통치했다. 껍질과 뼈 안쪽에 작은 구멍을 내고 불에 구우면 바깥쪽에 가로세로로 균열이 생긴다. 다양하게 생긴 균열을 점괘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점괘와 실행한 내용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그야말로 조선왕조실록과 다르지 않다. 갑골 비림에 30개 정도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갑골학 전문가 2명이 엄선한 ‘실록’이다. 앞면에는 갑골문을 보여주고 뒷면에는 한자 번역을 새겼다. 갑골학 책 몇 권 읽고 다시 봐야 친근해질 듯하다.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왕릉유적으로 간다. 은허박물원에서 왕복으로 운행하는 관광차를 타니 약 10분 걸린다. 강을 건너 시골길을 달려 우관촌(武官村)에 이른다. 대형 무덤 13곳과 부장묘와 제단이 2,000여 개가 발견됐다. 청동기, 석기, 옥기, 도기 등 유물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무엇보다 보물인 사모무정이 출토된 곳이다. 황량한 들판 가운데 커다란 솥만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은허다. 갑골문을 창제한 상나라 생각에 걸음은 느리다.
시내에 있는 중국문자박물관으로 간다. 국가1급박물관으로 갑골문, 금문(金文), 간독(簡牘), 백서(帛書)를 비롯한 유물과 한자의 발전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여권을 보여주면 무료 티켓을 발매해 준다. 2009년에 개관한 첨단박물관이다. 3만5,000㎡ 면적으로 소장 문물이 4,000건이 넘는다. 갑골문을 비롯해 1급 문물이 305건이다. 무엇보다 갑골문을 아주 가까이서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은허의 궁전이나 종묘, 왕릉에서 본 갑골문에 비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돋보기가 있어 갑골문의 획과 크기를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은허에서 발굴된 5,000여 개 갑골문 중 해석이 가능한 글자는 1,500개에 이른다. 조자(造字) 방법을 따라가니 한자와 연관성이 보인다. 모양을 본뜬 상형을 기본으로 한다. 사물은 아니지만 방향처럼 그냥 봐서 알 수 있는 지사(指事)는 간단하다. 합체해서 만든 회의(會意) 글자는 생각보다 많다. 소리와 뜻을 구분해 결합하는 형성(形聲)도 있다. 발음이나 모양을 빌려서 만드는 가차(假借) 등을 소개한다.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볼수록 신기하다.
청동기 속에 새긴 금문의 변천도 알려준다. 갑골문에서 변화한 금문이다. 복제품이긴 해도 서주 시대의 내반(逨盤)이 진열돼 있다. 진품은 해외 전시 금지 문물로 분류돼 있다. 대형 쟁반 안에 21행 360자가 새겨져 있다. 서주의 왕을 보좌해 출정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등의 내용을 적었다. 갑골문이 청동기 속으로 들어오니 세련되고 단정해진다. 도자기에도 글자를 새겼다. 전국 시대 연나라의 진품 도기에 새긴 도문(陶文)이 있다. 설명이 없어 무슨 글자인지 불분명하다. 화폐나 도장에 새긴 문자도 전해진다. 전국칠웅이라 했으니 나라마다 표기가 달라졌다.
진나라는 문자일통(文字一統)을 구현했다. 무력으로 통일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표준이 생기니 좋았다. 대나무 조각에 새긴 간독과 비단에 쓴 백서도 생겨났다. 종이가 발명되자 서체도 다양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어휘는 날로 발전했으며 지식은 기록이 됐다. 책으로 전승됐다. 한자문화권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갑골문은 남다르다. 세상의 모든 일을 꼼꼼히 기록한 상나라 후기의 호모사피언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껍질과 뼈를 빌려준 거북과 동물에게도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