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이 세기의 바둑 대결을 벌인 2016년 봄, 세상은 충격으로 가득했다. 공상과학으로 그려보던 미래가 현실이 됐다는 흥분도 잠시, 이내 '일자리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즈음 제출된 국제적 석학의 암울한 미래 일자리 전망도 가세했다. 그러나 몇 년 후, OECD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9년 주요 회원국들의 고용은 눈에 띄게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IT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교차된 2020년 이후의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를 단순한 산술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동화 기술로 대체될 일자리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새 일자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라 한다면 기술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을 포함해 전 직업군에서 증가한 고용 현실이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요인 중 일 연구자로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자리의 성격'이다. 산업 선진국의 많은 일자리는 한두 가지 단순 직무가 아니라 여러 직무의 꾸러미로 구성된다. 어떤 직무는 자동화되면 더 이상 사람 손이 필요치 않지만, 어떤 직무는 더 정교하고 복잡해진 부분을 담당할 인력을 요구한다. 한 사람의 일자리가 복잡한 여러 직무로 구성된다면 이 일터에서 기술은 인력의 손쉬운 대체재가 되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이 복잡한 일에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거드는 보완재라고 보는 게 맞다. 격동하는 산업적 융합 상황에서 유지 가능성이 높은 복잡한 일자리는 노동자에게 한층 높은 변화 적응력과 혁신 역량을 요구한다.
일례로, 한때 전자 기업은 가전제품 시장에 주력했지만 이제는 자동차, 통신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도 깊숙이 들어가 있다. 전자기업 임직원은 모빌리티 환경에서 다양한 산업 간 융합을 이해하고, 다층적 협업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 각 직무는 세분화된 전문성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기존의 표준 산업 및 직업 분류로는 이 현실을 읽어내기도, 전망하기도 어렵게 됐다.
일자리 변동 양상이 국가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각국의 기술 발전 수준, 산업 구조 등의 변수도 중요하지만, 역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자리와 일터의 성격이다. 한 사회에서 일자리가 얼마나 단순하게 혹은 복잡하게 구성되는지, 현장에서 일을 어떻게 조직하는지가 일자리의 소멸 또는 유지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필자가 동료와 수행한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 미국, 독일의 전 직업에서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위험을 분석한 결과, 문제해결형 혹은 사회관계적 성격이 높은 일자리가 덜 위험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의 재량과 권한을 부여하고, 상호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 역량을 높여가도록 하는 '학습 조직형 일터'에서의 일자리 위험이 적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일터는 위와 같은 '일터 혁신'을 이뤄 오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은 수동적이고, 일터에는 위계에 따른 경직성이 크다. 한국에서 유독 기술 대체에 대한 일자리 불안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챗GPT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일자리 우려가 또다시 커졌다. 이제까지의 자동화와는 성격이 다른 기술 영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향후 3~4년간은, 즉각적 고용 충격이 전면화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용이 증가할 개연성도 높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현재의 기술 전개는 고용충격뿐 아니라 노동자가 지닌 인적, 사회문화적, 심리적 자원에 따라 한층 심화한 노동시장 불평등을 예측하게 한다. 이 3~4년은 어쩌면 마지막 골든타임일 수 있다. 정부는 고용 충격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변화 속 일자리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못 따라가는 일터 및 일자리의 체질을 고도화해야 한다. 또 OECD 회원국 중 최하 수준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 예산을 시급히 증액해 노동 회복력을 높여야 한다. 결국 모든 일터의 중심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어떻게 일하는가는 노동자, 산업, 국가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