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에 잠들고 물소리에 눈뜨고… 옛 선비의 숨결 머금은 아홉굽이

입력
2023.07.12 04:30
20면
<210> 성주 무흘구곡과 포천구곡

대구에서 낙동강을 건너든 김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진입하든, 경북 성주 땅에 접어들면 들판이 온통 비닐하우스다. 전국 참외의 70%를 생산하는 성주는 이 풍광을 ‘성주 10경’이라 자랑한다. 대개 수려한 자연 풍광을 꼽기 마련인데, 성주는 지역 경제의 큰 몫을 담당하는 ‘참외하우스’를 당당히 볼거리로 올려놓았다. 그렇다고 빼어난 자연이 없을까. 성주 서쪽은 들판보다 산이 많다. 가야산 줄기에서 흘러내린 계곡이 깊고도 길다. 수륜·가천·금수면과 김천 증산면까지 이어지는 무흘구곡은 35km가 넘어 전국의 구곡 중 가장 길다. 무흘구곡에 합류하는 포천구곡 물줄기는 지역에서 이름난 피서지다.



대학자에 헌정… 전국에서 가장 긴 무흘구곡

대가천 넓은 물줄기가 휘감아 도는 수륜면 강변 언덕 아래에 회연서원이 있다. 무흘구곡이 시작되는 곳이다. 아홉 개의 빼어난 물굽이, 구곡(九曲)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비롯된 유교적 이상향이다. 하류에서 상류로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이름 짓는다.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문신인 한강 정구(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후인 인조 5년(1627)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앞서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후학을 기르던 곳이다. 정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큰 스승으로 떠받드는 인물이다. 외증조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해 실학의 초석을 놓은 학자로 평가된다. 장현광 허목 이윤우 등 제자가 300명에 이를 정도인데 특히 허목에서 이익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학맥은 후대에 정약용에게까지 닿는다.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나라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해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회연서원은 강당과 동·서재, 정구가 직접 조성한 정원과 유물 전시관이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 서원 뒤편 바위 언덕이 바로 무흘구곡 제1곡 봉비암(鳳飛岩)이다. 꼭대기에 오르면 발아래를 휘감는 대가천 물길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정구의 6세손 정동박의 요청으로 1784년 김상진이 그린 ‘무흘구곡도’를 보면 바위 형상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하천 건너 제방에서 어렴풋이 그 형체가 잡히는데,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바위를 가렸다는 걸 감안해도 그림은 실제보다 과장된 듯하다.

봉비암은 듣기 좋게 봉황이 날아간 자리로 해석하지만, 실제는 기생 ‘봉비’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봉비가 춤을 추다 실족해 목숨을 잃은 바위 아래 깊은 소(沼)를 ‘봉비연’으로 불렀는데 뒤에 회연으로 바꿔 무흘구곡 제1곡으로 삼았다. 무흘구곡 역시 무슨 심오한 뜻을 품은 지명이 아니라 단지 ‘무이구곡’과 비슷한 발음으로 지은 명칭이다. 정구의 ‘주자 사랑’이 반영된 작명이다.

흠모의 절정은 1.5km 상류에 위치한 제2곡 한강대다. 주자가 어머니 무덤가에 ‘한천정사’를 짓고 묘소를 돌보며 후학을 가르친 것처럼 정구는 ‘한강정사’를 세우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언덕 꼭대기에 현재는 ‘한강정’이라는 전망대가 올라앉아 있다. 정구의 호 한강(寒岡)은 이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봉비암처럼 깎아지른 바위 봉우리 아래로 대가천 물길이 휘어 도는데, 정자 아래 바위에 효기우음(曉起偶吟)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밤에 소나무 사이 집에서 자고(夜宿松間屋), 새벽에 물가의 집에서 잠을 깬다(晨興水上軒)’고 했다. ‘물결 소리 앞뒤로 우렁찬데(濤聲前後壯), 때때로 고요함 속에 들려온다(時向靜中聞)’고 덧붙였다. 솔바람에 잠들고 물소리에 깨어나는, 자연에 묻혀 사는 대학자의 소박한 일상이 그려진다. 언덕 아래 ‘갖말’에서 대가천으로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얕은 보 위의 돌다리를 건너면 잔잔한 수면 위로 솟은 한강대의 모습이 또 달리 보인다.

무흘구곡은 정구가 이곳에 성리학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 후 오랜 기간 후학들에 의해 완성됐다. 큰 스승에게 바치는 제자들의 헌사인 셈이다. 제3곡 무학정(舞鶴亭)은 한강대에서 무려 17km나 떨어져 있다. 잔잔히 흐르던 물길이 돌출된 봉우리에 막혀 잠시 휘어지는 곳에 정자 하나가 올려져 있다. 안전상 올라갈 수는 없다. 물굽이 바깥쪽 얕은 물가는 여름철 지역 주민들의 피서지다. 암반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대가천 피서지는 제4곡 입암(立巖), 제5곡 사인암(捨印巖), 제6곡 옥류동(玉流洞)까지 이어진다. 커다란 바위가 촛대처럼 우뚝 솟은 입암(선바위)은 구곡 중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언급된다. 사찰 입구의 당간지주처럼 무흘구곡의 절경으로 빠져드는 표식인 셈이다.




제5곡 사인암부터는 김천시 증산면이다. 이전까지 성주 땅이었다가 19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천에 편입됐다. 달빛을 가득 담았다는 제7곡 만월담(滿月潭),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을 비유한 제8곡 와룡암(臥龍巖), 용이 솟구쳐 올랐다는 제9곡 용추(龍湫)까지는 가파른 암반에 굽이치는 물소리가 청량하다. 특히 수직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의 물소리는 계곡 한가득 시원하게 퍼진다.

무흘구곡은 모두 도로변에 위치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8곡 ‘와룡암’ 글자 일부는 도로를 정비하며 가려졌다. 더 알리려는 욕심이 오히려 가치를 훼손한 꼴이다. 접근성만 고려한 무신경이 안타깝다. 만월담과 와룡암 사이 무흘정사(武屹精舍)는 정구가 거주하며 강학한 곳으로, 무흘구곡의 핵심 공간으로 꼽힌다. 외부인의 방해 없이 학문과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학자에게 한 말씀 들으려는 선비들의 발길이 이 깊은 골짜기까지 끊이지 않아 정구는 다시 인근 칠곡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무흘정사는 현재 번듯한 기와집으로 복구해 놓았다.



아담한 계곡에 시원한 물줄기, 포천구곡

무흘구곡 제2곡 한강대 바로 위에서 대가천과 합류하는 화죽천은 포천계곡으로 불린다. 물 맑고 경치 좋은 이 계곡 중상류에도 구곡이 설정돼 있다. 제1곡 법림교(法林橋)를 시작으로 상류로 올라가며 2곡 조연(槽淵), 3곡 구로동(九老洞), 4곡 포천(布川), 5곡 당폭(堂瀑), 6곡 사연(沙淵), 7곡 석탑동(石塔洞), 8곡 반선대(般旋臺)를 거쳐 제9곡 홍개동(洪開洞)으로 이어진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 이원조(1792~1872)가 긴 관료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계곡 상류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은 후 설정한 포천구곡이다. 정구의 무흘구곡을 본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무흘구곡이 제자들에 의해 완성된 데 비해 포천구곡은 이원조가 물굽이 절경마다 시를 지어 칭송하고 구곡도까지 직접 그렸다.



약 7㎞에 이르는 계곡의 명칭이 된 4곡 포천은 너럭바위를 흘러내리는 가는 물줄기가 마치 베(布)를 펼쳐 놓은 것 같다는 비유다. 가야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은 사시사철 맑고 풍성하다. 대가천보다 폭이 좁은 대신 산자락에 우거진 나뭇가지가 그늘을 드리워 물놀이를 즐기기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다. 계곡을 따라 펜션과 식당이 밀집한 이유다.

만귀정 바로 아래 제9곡 홍개동에는 숲속에 감춰진 폭포 소리가 요란하다. ‘구곡이라 홍개동이 확 트였는데(九曲洪開洞廓然) 오랜 세월 이 산천을 아껴서 숨겼네(百年慳秘此山川). 새 정자 자리 정해 이 몸 편안하니(新亭占得安身界) 인간 세상 별유천지이로다(不是人間別有天).’ 남들이 모르는 자연 속에서 천리에 순응하며 살고자 한 선비의 소망이 투영된 듯하다. 구곡은 단지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 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되돌아보는 성찰의 문화다. 감각적인 물놀이도 좋지만 지그시 거닐며 옛 선비들의 삶의 철학을 음미해도 좋겠다.

영남 최대 규모 독용산성과 성주호

무흘구곡 2곡과 3곡 사이 대가천 중상류에는 성주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성주호가 있다. 농업용수를 공급할 목적으로 1997년 준공한 성주댐 호수다. 댐 건설로 6개 마을이 물에 잠겼지만 다행히 무흘구곡 경관은 수몰되지 않았다. 호수에는 ‘아라월드’ 수상레저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물위로 짧은 구간 산책로가 설치돼 있고, 수상스키가 시원하게 산중 호수 물살을 가른다.



호수 남쪽에 우뚝 솟은 독용산(956m) 정상 부근에는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용산성이 있다. 평균 2.5m의 석축이 무려 7.7km에 걸쳐 둘러져 있다. 가야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원이 풍부하고 내부 터가 넓어 장기전에 대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동문과 성벽 일부를 복원해 놓아 성곽을 따라 산책하며 산성의 웅장한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발아래로 성주호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고, 멀게는 높고 낮은 산줄기가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산성 주차장까지는 임도를 따라 시멘트 포장도로가 개설돼 있다. 폭이 좁고 굴곡이 심해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 주차장에서 동문까지는 약 1km 비포장 흙길을 걸어야 한다.

성주=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