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을 키우기 시작해 2년 전, 교외에 꽃밭을 만들기까지 장혜경(61)씨는 언제나 '식물'에 진심이었다. 수십 개 반려식물을 돌보다 지인들과 함께 땅을 사 꽃과 나무를 심고, 내친김에 홈가드닝까지 배웠다. "식물이, 어느 순간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삶이 돼 있었어요. 평생 식물을 만지며 살고 싶은데 아파트는 적합한 환경이 아니잖아요. 남편이 은퇴를 앞둔 시점이 되면서 자연 가까이로 터전을 옮겨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그가 지인들과 만들어 '제이스가든'이라 이름 붙인 꽃밭은 여생을 보낼 집 터로 낙점됐다. 백 명이 넘는 건축가를 수소문한 끝에 인연이 닿은 정현아(디아건축 소장) 건축가와 연대한 지 2년여 만에, 경기 양평 고적한 마을에 기분 좋은 감각을 발산하는 2층 전원주택(대지면적 408㎡, 연면적 182.46㎡)이 올라섰다. 장씨 부부 내외가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식물을 위한 놀이터' 같은 집이다.
'식물'에서 출발한 집이었다. 정 소장은 집 자체가 식물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전체 공간을 간결하고 깔끔하게 마감하고, 안팎으로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쾌적하고 밝은 환경을 구현했다. "가장 중요한 게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이죠. 은퇴 후 단출하게 살고 싶은 건축주 부부의 일상 패턴을 단단하게 잡아주면서 구석구석 자연을 끌어들였어요."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아담하면서도 큰 마당. 전원 주택의 마당이라고 하면 보통 수목이 가득 찬 정원이 떠오르는데 이 집의 마당은 여백이 가득한 앞마당을 너머 시야가 멀리 야생 습지와 숲까지 이어져 탁 트인 공간감을 자랑한다. 내밀한 정원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풍경을 집의 하이라이트로 삼기 위해 건축가는 현관에서 마당까지 긴 복도를 만들어 드라마틱하게 등장시켰다. "마당의 매력과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등장을 늦춘 거죠. 현관을 들어가 복도를 지나며 짧은 산책을 하다 마침내 만나는 풍경은 극적인 기분을 맛보게 합니다."
마당은 조경가의 도움을 받아 야생화와 그라스, 잔디로 채운 자연스러운 정원, 넓적한 돌, 낮은 담장과 나무 덱(deck)으로 단정하게 구성했다. 특히 실내와 마당 중간지대의 덱은 두고두고 만족도가 높은 공간. 덱과 보조를 맞춘 나무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보니 "자연이 나를 잡아놓는다"던 장씨의 말이 실감 났다. "언제고 나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라 가장 좋아해요. 아파트에 살 때는 식사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못했는데 이 공간에선 한 시간 이상 식사를 즐긴답니다."
부부의 주 생활공간인 1층은 어디를 둘러봐도 녹음이 그윽하다. 정원 애호가의 집이니 거실과 주방 사이 경계를 두지 않고 정원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란히 열어 두었다. 정사각에 가까운 집은 수납과 욕실 공간으로 쓰이는 중앙의 큰 매스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짜였는데 구석구석에 배치한 창이 서정적인 풍경을 찬찬히 끌어들여 편안하고 아늑하다.
1층이 일상에 뿌리를 내렸다면 2층은 여행지에 온 듯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현관에서 다락방까지 연결해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선, 넓은 야외 테라스, 욕실과 선룸(Sunroom)을 합친 온실 공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중 설계의 묘가 돋보이는 부분은 외부 덱과 실내 사이에 있는 2층 온실이다. 3.6m 높이로 끌어올린 유리 벽 덕분에 채광이 좋아 사계절 식물 작업이 가능한데, 특이한 점은 이 공간 구석에 온실 안팎 풍경을 바라보며 반신욕을 할 수 있는 욕조가 놓여 있다는 것. 양변기가 들어가 있는 공간만 부스로 가리고 나머지는 활짝 열어젖힌 오픈 욕실이다. 식집사인 안주인이 집을 지으며 실현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상인 온실 공간과 욕실, 각종 작업에 필요한 다목적실을 결합한 형태다. 온실이 1층에 있어야 한다거나 욕실은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결과다. 정 소장은 "한정된 면적에 온실을 만들기에 여러모로 딜레마가 있었는데 두 공간을 합쳐 활용하는 해법을 찾았다"며 "입체적인 레이어가 만들어지면서 이 집만의 재밌고 특별한 공간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토분으로 가득 찬 온실과 달리 2층 거실과 다락은 집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비워뒀다. 피아노가 놓인 공용 거실에선 한 달에 한 번꼴로 장씨와 친구들의 실내악 음악회가 열린다. 2년 전 이 집 터에 각종 꽃과 허브와 과일을 심은 텃밭을 만들었던 그 멤버들이기도 하다. 장씨는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음악도 하고 독서 모임도 하고 텃밭도 가꾼다"며 "모두의 꽃밭 위에 지은 집이니 앞으로도 변함없이 추억을 켜켜이 쌓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장씨는 집을 철저하게 재화적 가치로 여겼던 사람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특별한 기대 없이 평생 아파트에 살았고,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우는 데 자족했다. 아파트에 비해 투자 가치가 떨어지고 손이 많이 가는 '전원 주택'에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에도 싱그러운 식물로 가득 찬 전원 속의 집은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맞춤옷 같았다. 그는 '우연'이라지만 기실 인생이란 우연이 모여 운명이 되는 법. 식물을 가꾸고 주변 아름다움을 발견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는 그에게 자연과 식물을 살뜰히 품은 집은 오래전 시작된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작은 정원과 그 너머 자연이 보는 생활을 차분하게 만들고, 종일 감도는 잔잔한 빛이 그가 사랑하는 식물을 함께 키우는 집. 반복되는 일상을 살다가 때로는 풍채 좋은 산과 강이 바라보이는 2층에 여행하듯 머무르는 집에서 건축주는 비로소 행복의 속도를 익히고 있다고 했다. "뭔가를 느리게 하는 것, 가만히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식물의 속도를 배우고 있어요.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요, 촉촉한 공기를 머금고 식물들이 깨어나는 새벽이에요. '느리지만 제대로'인 시간이죠. 이제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한 나이잖아요. 딱 이 속도로 살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