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 남에게 갚아야 할 돈을 먼저 떠올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돈빚, 나랏빚' 등 빚을 지는 일은 개인과 단체를 가리지 않는다. 옛말에 '빚을 주면 상전, 빚을 쓰면 종'이라든지, '허허해도 빚이 열닷 냥이다'라는 말이 있는 바, 빚을 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다. 주로 농사를 짓던 예전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에 갚기로 하고 미리 얻던 '가을빚'도 있었다. '빚'의 고형인 '빋'이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빚을 내는 데 중간에서 소개하는 직업인 '빚거간, 빚지시'라는 말도 있으니, 빚은 시대를 막론하고 있는 존재리라.
빚이란 돈과 물질에 대해서만 지는 것은 아니다. 빚은 갚아야 할 은혜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바로 이 두 번째 빚을 눈여겨보려 한다. 주변에서 '마음의 빚을 갚지 못하여 마음이 늘 무겁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라면 그 마음속에는 감사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빚을 져서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신문 기사에서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서 받은 한 사람의 감동이 충분히 짐작된다. 물론 이 두 번째 빚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 오랫동안 갚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나 원한을 '묵은빚'이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사전에서 '환경빚'을 봤는데, 오염 물질이 그 처리 능력보다 많이 발생하여 환경에 피해를 주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 또한 우리가 지구와 후손에게 지는 큰 빚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처럼 말은 큰 빚을 갚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말이 빚을 얻게 할 수도 있다. 말로 남에게 진 빚을 '말빚'이라 한다. 북한어로 등재된 '인사빚'은 차려야 할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을 이르는 말로, 성의 없이 겉으로만 하는 인사치레와는 달리 받은 인사를 갚으려는 진정성이 보인다. 인사빚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말빚'을 기억한다면 겉만 꾸미고 실속 없는 말치레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말빚이 나왔으니 '글빚'도 짚고 가자. 글을 써 주기로 덥석 약속해 놓고 글이 나오지 않으면 돈빚 못지않은 부담을 느낀다. 글빚을 지면 하루하루를 무척 괴롭게 보내게 된다. 한 신문에서는 '지식인의 글빚은 세상을 향한 부채 의식'이라고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진 많은 빚을 감사히 되새기며, 오늘도 글로 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