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철학자의 책 '피로사회'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로 시작한다. 지금 시대의 질병은 무엇일까. 여러 개 중 하나는 '갓생' 아닐까 생각한다. 갓생은 '갓(God)'과 '인생(生)'을 합친 합성어로 일상을 부지런하고 생산적으로 살아 성취감을 얻는다는 뜻이다. 학업, 직장, 여가, 취미, 운동, 육아 등 모든 걸 열심히 해 모범적인 삶을 사는 '갓생 살기'를 추앙한다.
쉼이 불편한 시대가 있었다. 산업화와 함께 한 고도성장 시대엔 노동시간만큼 돈을 벌었다.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쓴 것처럼 성실, 근면이 최고 미덕인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의 사회였다. 그때의 사람들에게 쉼은 사치였다. 이후 기계 생산 덕분인지 정보화와 지식산업 위주의 발달 때문인지 과거보다 적은 시간을 노동해도 상당한 풍요를 누리는 시대가 왔다. 워라밸, 소확행, 욜로와 같은 삶의 방식이 유행처럼 번졌다. 쉬어야 더 성공할 수 있어! 쉬어야 더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어!라며 열심히 하면 촌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쉼이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그러나 이젠 '쉼'조차 '노동'이 되어버린 시대 같다. 취미, 휴가, 휴식, 여행 등 모든 걸 갓생으로 살아내려 한다. 쉼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일처럼, 결과물이 없으면 쓸모없는 일처럼. 한 30대 직장인의 여름휴가 계획이다. 주말 포함 9일간의 여름휴가다. 2박 3일은 일본 여행을 간다. 여행지에서 들를 빵집, 카페, 서점 목록이 스무 곳을 넘는다. 여행 내 브이로그 영상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매일 여행 소식을 올릴 예정이다. 여행을 다녀와선 인기 전시 두 개와 보고 싶은 뮤지컬을 관람할 예정이다. 곧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는 영화도 한 편 보고 넷플릭스 드라마도 완주하고 싶다. 주말엔 동네서점 글쓰기 원데이클래스에 참여했다가 곧바로 1박 2일 캠핑을 하러 간다고 한다. 난 "그럼 언제 쉬어요?"라고 물었고 그는 "생산적으로 쉬어야죠. 그냥 쉬면 아까워요"라고 했다.
나 역시 쉼도 목표지향적 노동이 된 지 오래다. 휴일이나 휴가 때도 읽고 쓰는 일에 도움 될 일을 한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전시장을 찾거나, 다음에 쓸 무엇을 위해 자료조사를 한다. 아이와 함께 쉬는 날에도 도서관에 가 아이 나이에 맞는 책을 고르거나 어린이 박물관, 과학관, 미술관, 체험관, 하다못해 원데이 놀이 수업을 예약하고 하나라도 더 보고 경험하도록 계획한다. 그러곤 우리의 쉼을 매우 만족한다는 듯 인스타그램에 올리거나 일기를 쓴다. 우리는 왜 낮잠을 자거나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면 죄책감이 드는 걸까. 밀란 쿤데라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언덕 비탈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에덴으로의 회귀'"라 했는데, 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에덴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는 것보다 더 죄를 짓는 기분일까.
곧 여름방학과 여름휴가다. 이미 계획을 빼곡하게 세운 사람도 많을 테다. 나를 위한 성장과 계발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이번 여름엔 '진짜' 쉬는 시간을 찾아보면 어떨까. 물론 나부터 쉬는 시간을 찾아야 한다.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재지 않고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을. 개인에게 자유로운 쉼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