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학살장→소련·미군 훈련장→독일군 상설기지...기구한 '이 도시'

입력
2023.07.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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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세계, 이곳] ⑨ 리투아니아 파브라제
러시아 역외 영토·벨라루스와 접경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소도시
소련군·미군 훈련하던 곳에 이번엔 독일군

독일이 해외에 '상설 군사기지'를 만든다. 아프가니스탄과 말리 등에서 유엔 치안유지 임무의 일환으로 파병한 적은 있지만, 해외 상설기지를 설치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이 결국 독일을 불러냈다. 오랜 악연에 참혹한 전쟁까지 치렀던 두 나라인데,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도 끝까지 러시아를 등지지 않으려던 축에 속했다. 그러나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가속시켰다. 유럽의 짐을 덜고 싶은 미국이 원했던 방향이다.

나토 최전방 동부 전선… 독일군, 결국 '상시 주둔'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에 병력 4,000명을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동맹의 동쪽 경계를 보호하기 위해 독일 군인들을 상시적으로 주둔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냉전 시절 '철의 장막'과 마주해야 했던 나라가 바로 독일(서독)이었기에 리투아니아 처지를 잘 안다는 말도 했다. 석 달 전만 해도 독일은 상설 주둔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독일의 '해외 군사시설'은 프랑스와의 협의하에 스트라스부르 부근에 두고 있는 '프-독 여단'과 역시 프랑스에 있는 유로콥터 훈련센터,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국방연락사무소 정도다.

리투아니아 동쪽에는 라트비아와 벨라루스 두 나라를 끼고 동쪽에 러시아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역외 영토' 즉 본국과 분리돼 떨어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가 리투아니아 서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다. 게다가 리투아니아 동남쪽 벨라루스는 푸틴 대통령과 친한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나라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벨라루스는 헌법을 고쳐가며 러시아 병력과 핵무기까지 자기네 땅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리투아니아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해 6월 독일은 리투아니아가 공격을 받는다면 여단 규모 병력으로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의 기지에서도 신속히 파병할 수 있다며 리투아니아에 상시 주둔시키는 것은 피했다. 그 대신 공동 군사훈련을 두 번 했고 오는 7일까지 세 번째 합동 훈련 '그리핀 스톰'을 한다. 거기 참가할 독일 기갑보병여단 1,000명과 탱크 300대가 이미 리투아니아로 이동했다. 훈련에 맞춰 피스토리우스 장관이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를 찾아가 '상설 주둔'을 얘기한 것이다.

한동안 밀리는 듯했던 우크라이나가 동부 전선에서 진격하고 있고 러시아는 내분인지 반란인지 모를 소동으로 시끄럽다. 비상한 시국에 열리는 훈련이니 리투아니아 지도부는 물론이고 나토 사무총장과 회원국 대사들이 총출동해 참관한다. 다음 달 중순에는 빌뉴스에서 나토 정상회의도 열린다.


소련 강제노동수용소, 유대인 학살장… 굴곡진 역사 품은 소읍

그래서 시선이 쏠리는 곳이 리투아니아의 파브라제다. 벨라루스 국경과 가까운 소도시로, 주변에 제이메나강과 두빙가강이 만난다. 제이메나강을 건너는 길목에 선술집이 생긴 것이 마을의 시초이고 그 술집이 지금껏 남아 있단다. 19세기 중반 폴란드 바르샤바-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철로가 지나가게 되면서 마을이 커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주민 3,000명에다 그중 3분의 1은 이디시(러시아 유대인)였다.

1940년대 소련 시절에 시(市)로 승격했으나 그 후로도 내내 5,000~6,000명 정도 주민들이 벌목장과 증류소 등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소읍으로 남았다. 작은 도시치고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꽤나 많이 치였다.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원체 복잡하다. 중세에 리투아니아 '공국(公國)'이다가 러시아 제국에 병합됐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잠시 독일이 점령했다. 1918년 독립 공화국이 됐지만 독립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러시아 볼셰비키를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 호시탐탐 넘보는 폴란드 등과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소련을 경계한 공화국 정부는 1940년 무렵 파브라제에 공산주의자들을 가둬두는 강제 노동수용소를 만들기도 했으나 이내 진격해온 소련군이 '해방'을 시켰다. 그해 소련은 '발트 3국'으로 통칭되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세 나라를 병합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하면서 한동안 독일군이 점령을 했고, 파브라제의 수용소는 나치 손에 들어가 유대인 학살장이 됐다.

독일이 패하고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일부가 됐으나 독립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반세기를 기다려 1990년 3월 독립했다. 소련이 해체되기도 전에, 연방에서 맨 먼저 갈라져 나온 나라였다. 분리독립을 막으려는 소련의 마지막 반격 속에서도 공화국을 선포했고, 독립 이래 지금껏 루카셴코 대통령이 독재를 해온 낙후된 벨라루스와 달리 민주주의를 지켰다. 화학제품과 기계 부품 산업을 키우며 한동안 두 자릿수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발트해의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러시아와 중·동부 유럽국들 사이에서 수출로 먹고살다 보니 외풍을 많이 타지만 1인당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됐다.

서유럽을 기웃거리다가 독재로 손가락질당하니까 푸틴 대통령에게 기운 벨라루스 정권과 달리 리투아니아의 정치권과 여론은 언제나 서쪽을 향해 있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2004년 나토 멤버가 됐다. 같은 해 유럽연합(EU)에 들어갔으며 2007년 단일통화를 채택함으로써 유로존에 통합됐다. 2018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이 됐다.



동과 서에 낀 처지… 미군기지 유치 '숙원'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파브라제 같은 지방 소도시들에는 오히려 소멸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소련 시절 조금씩이라도 늘던 인구가 독립 뒤로는 오히려 갈수록 줄었다. 2021년 주민 수는 5,000명이 채 못 됐다. 그나마도 절반 가까이는 폴란드 국적이고 그 외에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등등이 섞여 산다.

그런 파브라제에 시선이 쏠린 것은 201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 도시를 규정하는 곳이자 사실상 도시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군사훈련 시설 때문이다. 125㎢, 서울 면적 4분의 1이니 어마무시하게 큰 훈련장이다. 1904년 만들어져 점점 커진 훈련장은 오랫동안 소련군이 썼다. "파브라제 시내에서 2㎞ 거리, 행정 건물 6개동과 저장소 2개동, 군용 천막시설 150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 시설을 찍은 사진들을 분석해 1965년 만든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빼앗은 뒤 한층 더 불안해진 리투아니아는 서방 군사력을 '유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2014년부터 미군 중대 약 200명이 리투아니아에 교대로 주둔하며 훈련을 했는데 2019년부터는 규모가 500명으로 늘었다. 나토의 무기와 병력이 필요하다고 설득해 2018년에는 폴란드에 있던 에이브럼스 탱크와 브래들리 전투차량이 파브라제로 이동해 훈련을 했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 러시아와 긴장이 한껏 높아진 2021년 텍사스 포트후드의 미 육군 제2대대 제8기병연대가 파브라제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9개월간의 군사훈련 목적이었지만 '발트해 지역의 첫 미군 교환소(PX)'를 열며 사실상 장기 주둔 태세에 들어갔다. 그해 8월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파브라제에 새로 지어진 미군 훈련소 '캠프 허쿠스'를 방문했고 국방장관은 "우리 동맹국이 영구 주둔하기를 바란다"며 미군에 손짓을 했다.

영구적인 미군기지를 유치하는 것은 리투아니아의 오랜 바람이었다. 리투아니아 국영 LRT방송은 그 전초작업으로 컨테이너 주택과 농구장, 배구 코트, 체육관 등을 갖춘 훈련캠프를 만드는 데에 700만 유로(약 100억 원)가 들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지난해 3월 기타나스 나우세다 대통령은 다시 파브라제의 미군을 찾아가 격려를 했다. 600명 수용 규모의 캠프 허쿠스가 좁아졌다면서 올 2월에는 확장공사를 했다.

리투아니아는 파브라제는 물론이고 루클라, 카즐루루다 등의 기지와 훈련시설을 확장하는 등 군사 인프라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폴란드의 드라프스코, 독일의 그라펜뵈르와 맞먹는 훈련장을 짓겠다면서 전체 국토 6만5,300㎢의 1.2%에 이르는 땅을 군사훈련장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LRT에 따르면 "독일 등 동맹국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탄약 보관창고 등의 인프라를 2025년까지 구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러시아 역외 영토와 가까운 카즐루루다 등에 1년 내 훈련캠프를 새로 짓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그런다고 미국이 러시아를 코앞에 둔 곳에 미군을 영구 주둔시킬 리 없고, 대신 독일을 압박해 밀어 넣는 모양새다. 이리하여 리투아니아가 짓고, 소련군이 쓰다가, 미군이 훈련하던 파브라제에 독일군이 들어가게 됐다. 다음번에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어느 나라 군대일까. 지구는 둥근데, 발트해 나라들은 '동과 서' 사이에 낀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영영 없는 것일까.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