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국내 햄버거 시장은 롯데리아와 맥도날드, 버거킹이 경쟁하는 3강(强) 구도였다. 롯데리아가 1979년 햄버거를 한국에 처음 선보인 이래 버거킹(1984년), 맥도날드(1988년)가 줄줄이 상륙했다. 40년 넘게 세 브랜드의 경쟁 구도는 굳건했다.
하지만 최근 햄버거 시장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단 기존 브랜드들의 장사 실적이 영 시원치 않다. 맥도날드는 지난해 278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버거킹은 영업이익(79억 원)을 냈지만, 전년 대비 68.4% 급감했다. 롯데리아도 겨우 흑자 전환(17억 원)한 정도다. 같은 기간 버거 시장 규모가 8.6% 커진 점을 감안하면 전부 역성장한 셈이다.
시장은 팽창했는데, 터줏대감들이 죽 쑤고 있다면 그 틈새를 파고든 후발주자가 있기 마련이다. 미국 프리미엄 ‘수제버거’ 브랜드들이 주인공이다. 미국 3대 버거 프랜차이즈 ‘파이브가이즈’가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에 연 국내 1호점은 연일 ‘오픈런’으로 문전성시다. 미 동부에서 유명한 ‘쉐이크쉑’ 또한 2016년 첫 매장을 낸 뒤 닷새 만에 버거 1만5,000개를 팔아치웠다. 미 서부의 강자 ‘슈퍼두퍼’도 강남 매장에서만 하루 1,400개 넘게 제품을 판매한다. “햄버거 신(新)삼국지가 도래했다”는 분석이 괜한 말은 아닌 것이다. 공교롭게도 세 브랜드의 1호점은 모두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 강남대로에 있다. 세 매장을 직접 찾아 젊은층이 왜 미국산 수제버거에 열광하는지 이유를 들여다봤다.
“25번요, 25번!”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30분, 파이브가이즈 1호점(강남점). 강렬한 록 사운드에 섞여 음식 완성을 알리는 직원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주방은 조리 과정을 다 볼 수 있게 전면 개방돼 있고, 직원들도 리듬에 맞춰 흥겹게 일하고 있었다.
사실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가 선호하는 브랜드이지만, 현대식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 키오스크(무인주문기)도, 진동벨도 없다. 대면 주문을 하고, 번호표를 받고, 음식이 완료되면 직원들이 고래고래 소리친다. 차라리 미국 특유의 마초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오랜 기다림 끝에 주문대 앞에 섰다. 파이브가이즈는 여덟 종류의 햄버거에 토마토, 할라피뇨 등 15가지 토핑을 공짜로 준다. 산술적으로 25만 개의 조합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직원이 “주문하시겠어요?”라고 묻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쭈뼛하다 치즈버거에 토마토, 피클 등 8가지 기본 토핑을 얹어주는 ‘올더웨이’ 옵션을 택했다. 몇 분 뒤 “85번”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허겁지겁 주문대에 가보니 흔한 쟁반도 없이 갈색 종이봉투 하나를 건넨다. 이곳은 매장에서 먹든, 포장해서 가든 주문 메뉴는 무조건 봉투 안에 때려 넣는다. 자리를 잡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꺼낸 후 봉투를 찢어 쟁반 대용으로 썼다.
버거도 미국을 연상케 하는 풍미가 입안에 감돌았다. 순수 땅콩기름에 구워내는 고기 패티는 한 입 베어 물면 고기 조각이 우수수 떨어질 만큼 식감이 묵직했다. 매일 전국 각지의 감자 농가에서 생감자를 공수받아 뭉텅뭉텅 썰어낸 뒤 투박하게 튀겨내는 감자튀김도 일품이었다. 물론 단점도 보였다. 이곳에선 버거 온기를 유지하려 종이 대신 은박지로 포장하는데, 포장지 안에서 채소 수분이 흘러나와 다소 눅눅한 빵맛이 났다. 입을 움직일 때마다 기름범벅이 되는 손가락도 처치 곤란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가격이 시쳇말로 ‘안습(안구에 습기 찬다)’이다. 치즈버거와 감자튀김 소(小)자, 탄산음료 등 기본 메뉴만 시켰는데 무려 2만5,700원이 나왔다. 음료를 쉐이크로 바꾸기라도 하면 3만 원대까지 치솟는다.
파이브가이즈 매장에서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2016년 7월 개점한 쉐이크쉑 1호점이 있다. 분위기는 정반대다. 야성미가 물씬한 파이브가이즈와 달리 쉐이크쉑은 ‘산뜻함’이 무기다. ‘선 킵스 온 샤이닝(sun keeps on shining)’ 같은 상쾌한 음악이 매장을 감싸고 목재 테이블과 나무 벤치가 손님을 맞는다. 여기에 테라스와 캐노피(지붕 덮개), 화분까지 말 그대로 ‘도심 속 공원’을 떠올리게 한다. 미 뉴욕 맨해튼의 ‘매디슨스퀘어 공원’ 한쪽에 마련된 핫도그 카트에서 출발한 쉐이크쉑의 역사적 정체성을 인테리어로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인 ‘쉑(Shack) 버거’를 주문하니 15분 후 진동벨이 울렸다. 햄버거는 상추, 치즈, 토마토 등 내부 재료가 한눈에 보이도록 비스듬히 쌓여 있었다. 먹어보니 따뜻한 샌드위치 느낌이 났다. 재료 하나하나의 식감이 살아 있고, ‘크링클컷’으로 불리는 구불구불한 모양의 감자튀김도 바삭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시그니처 격인 달콤한 바닐라 쉐이크에 짭짤한 감자튀김을 찍어 먹는 것 또한 별미였다. 다만 소스 크림향이 진한 편이라 느끼한 걸 싫어하는 소비자는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아주 미국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짜고 기름진 미국 음식의 특성을 버리지는 않았다. 가격도 세트(햄버거+감자튀김+음료) 기준 2만 원대 중반이라 저렴하다고 보기 어렵다.
쉐이크쉑 강남점에서 직선거리로 100m 정도 걷다 보면 슈퍼두퍼 강남점이 나온다. BHC는 지난해 11월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수제버거 슈퍼두퍼 1호점을 이곳에 냈다. 오렌지 빛깔이 가득한 매장은 햄버거 가게라기보다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더 가까운 고급스러움을 뽐냈다. 키오스크로 ‘슈퍼두퍼 싱글버거’ 세트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가자 포크와 나이프로 햄버거를 썰어 먹는 손님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두 손으로 햄버거를 들고, 있는 힘껏 입을 벌려 먹어야 하는 파이브가이즈나 쉐이크쉑과는 취식 방법이 정반대였다.
맛도 담백했다. 친환경, 슬로 푸드, 신선한 재료 ‘삼박자’를 강조하는 브랜드답게 패티는 기름기가 쏙 빠진 은은한 맛이 혀를 감쌌다. 마요네즈 향도 강하지 않아 재료 본연의 풍미를 충실히 끌어내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나마 ‘킬링포인트’를 찾는다면 노릇노릇 구워진 진갈색의 번(bunㆍ햄버거빵) 정도다. 겉 표면의 바삭한 식감과 안쪽의 부드러운 속살이 조화를 잘 이뤘다. 고기를 갈아 넣은 토마토 소스 ‘볼로네제’가 뿌려진 감자튀김도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눅진한 패티를 품은 미국식 햄버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가격도 ‘슈퍼 더블버거’ 세트 기준 2만 원대 중반으로 딱히 장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