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경찰에 신고했느냐.”
50대 여성 A씨는 2021년 8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신인은 전 연인 B씨였다. 1년 전 B씨는 A씨가 이별 후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의심하며 그의 집 창문을 깨뜨리고 주택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보복이 두려웠던 A씨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도 갔다. 안심하던 차에 B씨가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과정은 이랬다. 가해자는 복역 중 A씨가 제기한 민사소송 소장 부본을 받았다. 여기에 피해자의 ‘바뀐’ 주소지가 떡 하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출소 다음 날 그는 주소지로 찾아가 A씨 차량 앞유리창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B씨는 “주변에 남자 있으면 반드시 죽일 거야” 등 또 온갖 협박을 쏟아냈다. 집 현관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다시 체포된 B씨에게 법원은 징역 1년 6개월을 부과했다.
최근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는 “가해자가 이사 간 제 주소를 달달 외우고 있다”고 토로했다. 소송 과정에서 인적사항을 입수한 가해자가 보복을 벼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항소심에서 가해자에게 징역 20년이 선고된 뒤에도 여전히 “두렵다”며 눈물을 흘렸다.
피해자 개인정보가 노출돼 보복으로 이어지거나 보복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아예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적 구제를 포기하는 피해자가 나올 정도다. 정보 노출을 최소화하는 방향의 제도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형사사건 피해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경로는 크게 두 갈래다. ①별도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다. 소송 당사자는 본인 실명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소장에 적어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이렇게 작성된 소장 부본은 피고에게 그대로 송달된다. 판결문에도 당사자 실명과 주소가 담긴다. ②범죄 피해자가 ‘형사배상명령’을 신청했을 때도 인적사항이 가해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 형사배상명령은 별도 민사소송 없이 형사재판 선고와 함께 배상을 받는 제도인데, 명령 인용 시 신청인(피해자) 성명과 주소가 적힌 판결문을 피고인이 입수할 여지가 생긴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에 ‘협박 편지를 받았다’는 글을 올린 사기 피해자도 있다. C씨는 지난해 1월 인터넷에서 카메라 판매 글을 보고 45만 원을 입금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사기범이 검거되자 배상명령도 신청했다. C씨를 비롯한 피해자 26명의 돈 2,300만 원을 뜯어낸 D씨에게 법원은 징역 2년을 선고하며 1,400만 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문제는 피해자 이름, 주소가 적힌 배상명령 판결문이 D씨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그는 “지금 심정 꼭 당신도 느끼게 해주겠다”고 C씨를 협박했다.
성범죄 전담 검사 출신인 이승혜 변호사는 “인적사항 노출 우려로 민사소송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소송을 하기로 결심해도 개명, 위장전입 등 각종 자구책을 동원해야 한다.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2021년 진행한 좌담회에서 한 성폭력 피해자는 “정보 노출을 피하려 친척 집에 위장전입 신고를 했다”고 증언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현행 사법체계는 피해자에게 안전이냐, 손해배상이냐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국회도 고민은 하고 있다. 2018년 1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민사소송 시 개인정보 노출을 제한하는 민사소송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에서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관련 개정안이 5차례 발의됐지만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2018년 10월엔 “성범죄 피해자 주소 등을 가해자에 보내는 법원을 막아달라”는 국민청원 게시글에 26만 명이 동의했으나, 청와대는 “소송 판결에 따라 강제집행 등의 조치가 뒤따라 인적사항을 기록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 변호사는 “이미 형사 절차에선 법으로 공소장, 증거기록에 피해자 인적사항을 가릴 수 있게 된 만큼, 민사 분야도 보호장치가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해외에선 보복 범죄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개인정보 비공개 절차를 마련한 나라가 여럿 있다. 프랑스에서는 범죄 피해자가 제3의 주소를 자신의 주소로 신고할 수 있다. 일본 역시 소송 기록에 사생활 관련이 기재돼 있으면 당사자만 열람이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