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직장인 이모(32)씨는 점심시간 부랴부랴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 현금 180만 원을 엔화 20만 엔으로 환전했다. 원·엔 환율이 900원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해진 것. 이씨는 “근 5년 이상 못 봤던 싼 가격이라 다음 달 일본여행 경비부터 넉넉히 환전했다”면서 “800원대까지 떨어지면 투자금을 보태 본격적인 ‘엔테크(엔화+재테크)’에 뛰어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근 엔화 값이 하락을 거듭하면서 900원대 붕괴를 눈앞에 두자 싼값에 미리 쌓아두려는 개인들이 적극적으로 매수에 나서고 있다. 여름휴가철 여행객 실수요와 향후 환차익을 노린 투자자들 관심이 나란히 증폭되는 모습이다.
16일 오후 3시 30분 기준 하나은행이 고시하는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903.82원을 기록했다. 4월 말까지만 해도 100엔당 1,000원을 넘나들었는데, 두 달 만에 100원 가까이 추락했다. 최근 달러화 대비 엔화가 약세를 보인 반면, 달러화 대비 원화는 강세를 보이면서 원·엔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원화가치 상승)한 것으로 풀이된다. 추세가 유지된다면 머지않아 2015년 6월 이후 처음 800원 대에 재진입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8년 만에 돌아온 엔저에 4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엔 엔화에 투자하려는 고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가격이 낮을 때 사뒀다가 가치가 올랐을 때 팔아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기준 이들 은행의 엔화예금 잔액은 6,979억 엔(6조3,133억 원)으로 4월 말(5,788억 엔) 대비 1,191억 엔이나 급증했다. 증가세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달 15일 기준 엔화 예금 잔액은 보름 사이 1조 원 넘게 유입돼 8,110억 엔까지 불어났다.
엔화를 저렴하게 사서 일본여행 때 쓰려는 ‘실물 수요’ 역시 만만찮다. 일본정부관광국 집계에 따르면 1~4월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206만7,700명으로 전년 대비 125배 폭증했다. 이 기간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중 한국인 비율은 31%로 압도적이었는데, 엔저가 일본 여행을 더 부추길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저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연내 금리를 0.5%포인트 더 올릴 수 있다며 ‘매파적 동결’을 시사한 반면, 일본 중앙은행은 나 홀로 마이너스(-) 금리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도 일본은행은 경제 성장을 위해 단기금리(연-0.1%)를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를 연 0% 수준으로 유지하는 등 대규모 금융완화정책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처럼 금리 격차가 계속 벌어지자 달러당 엔화 값은 장중 141엔대를 넘어서며 약세를 보였다.
당장 변수는 원화 환율이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4월 엔·원 환율이 반짝 오른 건 원화 약세 때문인데, 최근엔 반도체 업황 바닥 기대감 등으로 원화가 유독 강세”라며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엔·원 환율이 800원대로 내려가겠지만, 위험 회피 심리가 되살아나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지면 반대 흐름을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장기적으론 일본은행의 정책 기조 변화나 미국 긴축 종료 시점 등도 엔화 가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