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87)씨는 오늘 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았다. 10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둘째 딸 집에서 살고 있는데, 큰아들이 갑자기 법원에 성년후견개시 심판청구를 했다는 것이다. 만춘씨는 건물과 토지를 포함해서 약 30억 원 정도 재산이 있고, 은행에 다니는 사위가 재산을 관리하며 임대수익 등으로 만춘씨의 생활비, 교제비, 병원비, 약값을 내고 있다. 만춘씨는 둘째 딸 부부에게 고마워서 한 번씩 큰 용돈을 주고, 일부 부동산을 증여하기도 하며 노년의 삶을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 만춘씨는 부인과 사별하고 얼마 안 있어 치매증상이 나타나 병원에서 치매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중증도 이상으로 진행된 적은 없다.
큰아들은 외국 유학을 다녀와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사업을 한다며 뛰어들었는데 실패했고 한동안 만춘씨가 생활비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사업 종잣돈도 만춘씨가 만들어줬었다.
그런데 만춘씨가 둘째 딸 부부에게 한 번씩 큰 용돈을 주고 부동산을 증여한 것을 최근에 알게 된 후 법원에 '만춘씨가 중증 치매환자인데 동생 부부가 만춘씨를 신체적·정신적으로 학대했고, 무단으로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부동산을 증여받았다'라고 주장하면서 만춘씨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선임해달라는 청구를 했고, '증여가 무효이니 동생부부의 소유권이전등기는 말소되어야 한다'며 민사소송도 따로 제기했다.
병원에서 의사 앞에 앉아 정신감정을 받으며 만춘씨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노년에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녀들이 법정다툼을 벌이는 것을, 그것도 아들은 아버지가 중증치매환자라고 주장하면서 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을, 치매약을 복용하고 있긴 하지만 또렷한 정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중증치매에 걸려 휠체어에 앉아, 본인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면서 진료실 앞에서 본인의 정신감정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영옥(92)씨는 어떨까? 남편과 일찍 사별했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네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웠고, 상당한 재산도 일구었다. 그리고 딸들에게 신세 지기 싫어서 본인을 돌봐줄 사람을 따로 고용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치매증상이 나타났고, 불행히도 급속도로 진행됐다. 딸들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알고 영옥씨의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영옥씨의 재산관계 서류를 모두 확보한 후 지방에 있는 요양원에 입소시켰고, 영옥씨가 어디 있는지 다른 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다른 딸들이 성년후견개시 심판청구를 했고, 현재는 수십 년의 가족 간 역사를 일일이 들춰내면서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영옥씨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사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나마 위 사례는 자녀들이 법정다툼이라도 하고 있지만, 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그 가족이 아니면 알 수 없다.
올해는 성년후견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2013년 7월 민법개정을 통해 국내에 도입된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결여된 자의 '신상보호'와 '재산관리'를 법원의 관리와 감독 아래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물론 제도의 운용 측면에서 아직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이번 편에서 강조할 것은 혹시 치매증상이 있다면 열심히 치료 및 관리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매 초기에 후견제도에 대하여도 미리미리 검토해보라는 것이다. 본인의 정신이 온전할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후견인으로 지정해두는 '임의후견' 제도도 있다. 생소하고 거부감이 들 수 있겠지만, 재산이 있고 자녀들이 있다면 여기까지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