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회장 생가와 현대, SK 등 주요 기업이 포진한 울산시는 최근 기업인 조형물 건립을 두고 논란이 한창이다. 시는 내년 8월까지 울산과학기술원(UNIST) 소유 울주군 언양읍 야산에 40m 높이 조형물 2개를 조성해 지역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하지만 15일 시의회에서 관련 예산 중 부지매입 비용 50억 원을 제외한 200억 원이 삭감되면서 제동이 걸렸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이 국내 주요 대기업 창업주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해당 대기업의 지역 투자까지 이끌어 내고자 하는 포석이 깔려 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세금으로 공과가 뚜렷한 기업인에 대한 우상화가 적절하느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경남 의령군은 정곡면 장내마을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생가와 솥바위 8.5km 구간을 연결하는 ‘의령 남강 뱃길 사업’을 추진한다고 16일 밝혔다. 왕복 2시간가량 소요되는 뱃길을 부자 기운을 나누는 ‘고급 관광’ 코스로 개발한다는 게 골자다. 솥바위는 의령의 관문인 남강 가운데 솟아 있는 4m 높이의 바위다. 밥을 짓는 솥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후기 "바위의 다리가 뻗은 방향 20리(8km) 안에 큰 부자 3명이 태어날 것"이란 예언이 회자된 동네다. 실제 이병철 회장뿐 아니라 LG그룹 공동 창업주인 구인회 허만정 회장이 태어난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과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태어난 함안군 군북면 신창마을이 솥바위에서 지척에 있다. '부자 기운'을 머금은 동네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광객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처음 개최한 ‘리치리치 페스티벌’ 기간 군 인구(2만5,000명)의 4배에 달하는 1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이병철 회장 생가 방문객 수도 지난달 기준 8만여 명으로 역대 최대다. 오태완 군수는 “생가 주변에 '호암이병철대로'와 '삼성이건희대로'라는 명예도로명도 부여했다”며 “삼성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하고 구현하는 작업이 본격화되면 K관광콘텐츠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공동 창업주인 구인회‧허만정 회장이 태어난 진주 승산마을도 예부터 만석꾼이 많은 부자 마을로 통했다.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옛 지수초등학교는 국내 굴지의 기업인 30여 명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정에는 이병철·구인회·조홍제 세 사람이 심었다는 ‘부자소나무’도 있다. 한국경영학회는 2018년 진주를 ‘K기업가정신 수도’로 선포했고, 진주시는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업가정신 국립역사관 건립, 초중고교생 대상 팸투어, 남강 부자로드 조성 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옛 지수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K-기업가정신센터’에는 1년 만에 3만6,000명이 다녀갔다. 다음 달 9~11일에는 ‘K-기업가정신 진주 국제포럼’도 예정돼 있다.
정부도 지난 5일 주요 대기업 창업주 생가를 엮은 관광 코스 개발 방침을 밝히면서 지자체들의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공과가 분명한 특정 기업 홍보를 해주는 게 적절치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장 울산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진보당·정의당·노동당 등 야당과 진보성향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재벌 총수 흉상을 울산 랜드마크로 건립하면 울산시가 기업인을 우상화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실제 시의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칫 지역 주민 간 갈등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창업주가 해당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가에 대한 스토리를 담아 내는 것이 핵심이라고 조언한다. 김남현 동국대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는 “대기업 창업주와 관련한 관광 상품에 공공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심도 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관광정책은 공공성, 문제해결성, 미래지향성을 갖춰야 하는 만큼 기업의 ESG경영활동이나 고향사랑기부제 등을 적극 활용해 민관이 함께 자원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