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의 기원] "결혼·출산은 선택"... 세기말 청춘들의 각성이 출발점

입력
2023.06.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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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쇼크가 온다: 1-④절반세대 탄생의 기원]
4050세대가 말하는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

편집자주

1970년 100만명에 달했던 한해 출생아가 2002년 40만명대로 내려앉은 지 20여년. 기성 세대 반도 미치지 못하는 2002년생 이후 세대들이 20대가 되면서 교육, 군대, 지방도시 등 사회 전반이 인구 부족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국일보는 3부 12회에 걸쳐 '절반 세대'의 도래로 인한 시스템 붕괴와 대응 방안을 조명한다.


2002년은 도전, 영광, 신화의 한 해였다. 여름은 월드컵으로 달아올랐고, 겨울은 겨울대로 16대 대선 때문에 뜨거웠다. 20세기에 1988년이 있었다면, 21세기엔 2002년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해 전국의 산부인과에서는 뭔가 예전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뚜렷하게 잦아들었다.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통계로 보니 2002년 출생아 수는 전년(56만 명)에 비해 크게 줄어, 통계 집계 사상 처음으로 40만 명대(49만 6,000명)로 추락했다.

지나고 보니 2002년은 '저출산 원년'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젊은이들은 어떤 이유로 아이 낳는 걸 꺼리게 된 것일까? 절반세대의 탄생 기원을 되짚어보기 위해 한국일보는 저출산 흐름이 감지되었던 1990년대 후반부터, 저출산이 완연하게 고착된 2010년 정도까지 청춘을 보낸 이들을 만났다.

질문 대상은 현재 30대 중후반에서 50대 초반 중 △비혼·싱글 △무자녀·딩크 △한 자녀 가족의 삶을 살고 있는 10명이었다. 그들에게 물었다.

"결혼해서 애 둘 낳고 사는 '4인 가족 패러다임'을 벗어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결혼, 필수에서 선택으로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대로 가면 돼.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 가사(2013년)

김연자의 노래 가사는 이미 굳어진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결과였다. 2000년을 전후로 이미 결혼과 출산에서는, 느리지만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됐다. 결혼은 '모두가 하는 필수'에서 '행복을 위한 선택'으로 변했다.

1972년생으로 아이 없이 사는 딩크족(맞벌이 무자녀) 김승환(가명·51)씨도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저는 마흔 넘어 결혼했어요. (제가 결혼 적령기일 때)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하는 경향이 급격하게 나타났죠."

'애플민트'라는 브런치 필명을 쓰는 1977년생 여성(46)도 그때 뭔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저희 또래가 변화의 시작 같아요. 엄마 세대는 가부장적 환경에 적응된 삶을 살았다면, 전 '남녀가 평등하다' '여자도 자아실현하며 살아야 한다'고 배웠죠. 물론 교육과 현실 간 괴리는 있었어요. 골드미스란 말도 있었지만, 저 역시 30대 초반이 넘어가니까 남들은 다 하는 숙제(결혼)를 나만 못하고 있나 초조했으니까요."

김씨의 말처럼 통계를 봐도 결혼을 선택으로 여기는 사실상의 첫 세대가 지금의 40대와 50대다. 지난해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남성 17.6%, 여성 13.0%만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60대 이상으로 가면 "꼭 결혼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이 30%를 넘어 그 아래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높게 나타난다.

40대와 50대의 결혼 인식 변화는 실제 '행동'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의 혼인과 출산 생애 분석과 정책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40세 여성'을 기준으로 할 때, 1944년생은 미혼율이 1%, 1954년생은 2%, 1964년생은 4%로 매우 낮았다. 반면 1974년생은 마흔에 미혼인 비율이 12%로 10살 선배보다 3배나 늘었다. 생애 미혼율(50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비율)이 높은 일본(2020년 남 25.7%·여 16.4%)처럼, 한국도 조만간 '초싱글사회'가 도래한다는 전망이 많다.

시간이 지나면 결혼을 괜찮은 선택지로 여기는 세대가 다시 출현하지는 않을까? 시대가 바뀌면 가치관도 바뀔 수 있지만, 지금 통계만 봐서는 '아니올시다'이다. 지난해 사회조사에서 10대(13~19세)는 세대를 통틀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한 비율은 5.1%로 가장 낮고,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의견은 56.8%로 가장 높았다.

IMF 직후 혼인 건수 급감


한때 결혼하려던 사람도 있었지만, 서른 중반부터는 혼자 지내는 게 훨씬 즐겁고 편해요. 하고픈 것도, 놀 것도 많습니다. 누군가 만나서 데이트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주말에 좋아하는 음악 감상하며 술도 마시고, 취미 생활하는 걸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니까요.
1984년생 자발적 싱글 남성 송영성(가명·39)씨

인식의 변화는 통계로 증명됐다. 그런데 왜 하필 그때부터였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찾아온 경기 침체와 경제 불안 탓에, 그 시기의 2030세대가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했다는 분석이 많다. 이상림 보사연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1999년 전후로 구조조정과 청년 실업이 본격화하면서 그 여파로 2002년부터 '저출산 1세대'(절반세대)가 출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서히 '결혼은 미친 짓'이 됐다. 1996년 43만4,900건이던 혼인 건수는, 1997년 10% 급락해 38만9,000건이 됐다. 2000년부터 2015년까지는 30만~35만 건 박스권에 머물다가, 2016년 30만 건이 무너진 뒤로 줄곧 하락해 지난해 19만2,000건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정상 가족' 안에서 태어나야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결혼이 줄어드니 자연스레 출산도 감소했다. 동거 커플이나 여성이 혼자 아이를 가지는 혼외·비혼 출산은 굉장히 드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비혼 출산율은 약 40%인 반면, 한국 혼외출산율은 2.9%(2021년 기준)이다.

1970년대생 여성부터 교육 수준이 크게 상승하고, 경제활동참여율도 높아진 점 역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들 또래는 미혼율 상승은 물론 '아이 낳지 않는 기혼 여성'도 많아졌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출생 코호트(동일집단)별 기혼 여성의 미출산율을 분석한 결과, 30세에 50~54년생은 미출산율이 7.8%였던 반면 70~74년생은 23.2%, 80~84년생은 40.1%로 나타났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도 계속 증가 추세다. 80년대생 기혼 여성에게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는지를 물었다.


전 애초에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저 하나 돌보기도 힘들고, 회사 다녀오면 '오늘 큰일 해냈다' 농담처럼 그러거든요. 남편은 아이에게 쓸 돈 우리가 쓰자는 주의고요. (아이 없이 맞게 될) 노후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철저히 제 노후만 위해 애를 낳겠다는 발상은 너무 미안한 일 아닌가 싶어요.
1989년생 딩크 여성 박승은(가명·34)씨

여아 선별 낙태의 부메랑

2016년 전후로 나타난 '저출산 고착화의 원인을 과거 남아선호 사상에서 시작된 '선별 낙태'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산아제한 정책이 강하게 전개되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는 여아를 임신하면 낙태를 하는 경우가 많아, 당시 출생 성비는 113~116(여성 100명당 남성 수)까지 치솟았다. 강제로 성별을 선택하지 않았을 때의 자연 성비가 105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선별 낙태가 꽤나 횡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영태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장의 설명은 이렇다. "2017년 출산율 감소 원인 중 하나는 여아 낙태의 영향도 있고요. 2017년생의 부모 세대 격인 1988년생 숫자 자체가 적었습니다. 1982년생이 84만 8,000명인데, 1988년생은 63만 3,000명이니까요."

최종균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실장도 구조적 요인을 지적했다. "2015년 즈음 '2차 인구 절벽' 시기에 가임 여성 규모 자체가 줄었고, 이때부터는 결혼해도 아이 안 낳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둘째 셋째 문제가 아니라 첫아이부터 안 낳는 거죠."

경제 불평등도 원인


주변에서 '둘째 안 낳냐' 그러면 속으로 그러죠. '너가 대신 키워줄 거야?' 저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더 있었다면 마흔 되기 전에 하나 더 낳았을지 몰라요. 근데 돈도 너무 들고, 체력도 딸려요. 게다가 이 경쟁을 아이에게 또 시킨다? 부모님 도움 없이 대출 갚으며 아이 많이 낳아 기르기는 힘든 사회에요.
수도권 신도시에서 2017년생 외동을 키우는 1981년생 정혜림(가명·42)씨

경제적 불평등 심화도 주요한 사회적 요인이 된다. 보사연 '최근 분배 현황과 정책적 시사점'(2021)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 불평등 정도(지니계수)와 합계출산율은 역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즉, 경제적인 불평등이 누적될수록 출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불평등 지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악화 추세다.

특히 남성은 소득 수준별로 혼인 가능성에 큰 차이가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노동과 출산 의향의 동태적 분석'(2022) 보고서에 따르면 40대 초중반의 소득 1분위는 96%가 결혼한 반면, 하위 10분위는 58%만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곽은혜 부연구위원은 "남성 임금의 불평등도가 커지면, 결혼에 필요한 소득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남성이 늘어 결혼 가능성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1972년생 딩크 남성 김승환씨가 봐도 소득·자산과 출산의 상관관계는 적지 않다. "1960년대 후반 나이대 형들 보면, 학벌이 막 좋지 않아도 취직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대기업-중소기업 임금 격차도 안 심했고요. 그런데 IMF 이후에는 대기업 간 애들과 아닌 애들 임금 격차가 금방 벌어지더라고요. 계급 대물림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결국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안 되니 결혼을 안 하려고 하겠죠."

육아 불평등도 문제

'무자녀'나 '한 자녀'를 택한 1970·80년대생 여성들은 그 이유로 '여성에게 우선적으로 부과되는 육아의 책임'과 그에 따른 '커리어에 대한 악영향'을 들었다.

결혼 8년 차 무자녀 주말부부인 박연정(가명·34)씨는 아이는 좋아하지만 낳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가 애는 정말 좋아하거든요. 다만 제대로 못 키울 바에 아예 낳지 말자는 주의에요. 직장 특성상 근무지가 몇 년마다 바뀌다 보니,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할 것 같더라고요. '남편이 키우면 되지 않냐'는 분도 있지만, 저도 편견일지 몰라도 '완벽하게 육아하는 남편'상을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사회생활하며 본 건 '육아는 전부 엄마 책임'이라는 거였죠."

1980년생에 태어나 한 자녀를 둔 워킹맘 최윤정(가명·43)씨도 비슷한 이유로 둘째를 포기했다고 한다. "결혼 전부터 직장 생활하려면 하나만 낳아야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실제 낳아보니 둘은 도무지 안 되겠더군요. 회사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분위기라, 출산 휴가 3개월만 쓰고 바로 복직했어요."

저출산 2세대의 등장

이렇게 구조적으로 시작된 저출생 현상은 사회적 요인(여성에 집중된 돌봄·소득 불평등 심화)을 개선하지 못하면서 완벽하게 고착화했다. 2015~2017년부터 다시 출산율이 하락하며 '저출산 2세대'가 등장한다. '2세대 출현'에 대해서는 △헬조선 담론 △소셜미디어 사용 증대 △과시적 소비문화 등 전문가마다 지목하는 원인이 다양하다.

이상림 연구위원은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겪으며 ①가족의 친밀성과 효용성을 체감하지 못했던 80년대생이 이때 결혼 적령기였죠. 또 ②2015년 전셋값 폭등으로 청년들이 근로소득으로는 주거 장만이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작은따옴표도 없이 쓰일 정도로 널리 통용되는 사회다 보니, 아이의 미래가 부모의 재력에 휘둘리는 경향도 심해졌다. 아이 수는 줄었지만 쏟아야 할 노력이나 투자는 훨씬 커졌다. 그래서 아이 낳기가 훨씬 부담스러워졌다.

자녀가 있든 없든, 빠지지 않고 언급된 저출산 원인 중 하나가 '사교육비 부담'이었다. 1981년생 엄마 정혜림(가명·42)씨는 "영유(영어 유치원) 말고 일반 유치원 보내도 월 50만 원에, 놀이수학·독서토론·태권도 같이 주 1회 다녀오는 것만 보내도 100만 원 돈"이라며 "영유를 보냈다면 200만 원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는 경쟁 압력이 심하고 사회보장 수준이 약하다 보니 여전히 교육을 통해 자녀의 학력 자본(학벌)을 만들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도록 하는 게 부모의 사명이고 책임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결론 : 낳고 싶은 사람이라도 잘 키우게 해 달라

한국일보가 만난 10명 중엔 "젊을 때부터 확고한 딩크였다"거나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싱글"이라거나 "여유가 있었으면 두 명 낳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비혼과 무자녀를 사실상 '선택당한'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었다. "만약 그때 당신이 어떤 조건이었다면, 아이를 낳았을 것 같은가요?"

미래에 대한 확신 얘기가 있었다. 1989년생 딩크 박연정(가명·34)씨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세종시 출산율만 봐도 안정적 직장, 아이 낳고도 커리어 지장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아이를 낳는다"며 "출산장려금 500만 원 일시 지원, 이런 걸로는 사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낳으려는 이들을 뒷받침하고 도와주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말들도 나왔다. 1977년생 딩크로서 '애플민트'라는 필명을 쓰는 여성은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니 안 낳겠다는 사람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문제가 아니다"며 "어떤 가족 형태든 아이를 낳고 기르려는 분들을 응원하고 도와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아에 도움 받기 어려운 게 이유라는 푸념도 여전했다. 1982년생 딩크 김예현(가명·41)씨는 "할아버지 할머니 도움 없이 육아가 어려운 대한민국을 바꿔야 한다"며 "(제가 있는) 여성친화적 기업에서도 힘든데 소규모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눈치 보며 출산과 육아를 하고 있을지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가 돈을 퍼부었지만 실제론 한 게 없다는 따끔한 지적도 있었다. 결혼할 생각이 사라졌다는 1985년생 싱글남 강하늘(가명·38)씨의 얘기다.

"정부나 정치권에서 저출산이 문제라 말은 하지만 제가 봤을 땐 한 게 없어요. 공급자(정부) 입장에서 생색내기 좋은 정책만 많이 냈으니 반응이 없죠. 제가 인사(HR) 담당자로서 보면 IT 대기업 어린이집 같은 곳 정말 좋거든요. 이런 걸 국가가 맡아서 해줘야 하는데, 실제론 경제적 불평등만 커지니까 애를 더 못 낳는 거겠죠. 저는 진짜 자녀 가진 분들이 아이 잘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된다면, 돈이 투명하게만 쓰인다면, 요즘 얘기 나오는 '싱글세'도 부담할 용의가 있어요. 인구가 늘면 저도 그 혜택을 함께 누릴 테니까요."

최나실 기자
류호 기자
최동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