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 함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를 말한다."
건강가정기본법 제3조 1항은 가족을 이렇게 정의한다. 현행법에 따르면 혼인, 혈연, 입양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 개인은 타인과 가족을 이루어 살 수 없다. 하지만 사실혼, 비혼, 동성혼, 동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비친족 가구(5인 이하)는 2015년 20만 가구대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1년 47만2,660가구(가구원 101만5,100명)에 이른다. 빠르게 '법 밖의 가족'이 늘고 있지만 이들은 돌봄·주거·의료·복지·상속 등에서 제도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건강가정기본법은 외환위기로 이혼율이 치솟으며 가정 해체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2003년 제정됐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 (제8조)' '가족구성원 모두는 가족해체를 예방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제9조)' 등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의 해체를 막으려는 게 입법 목적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출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보면 시대 흐름에 뒤처졌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제정 당시에도 건강가정기본법은 여러 지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법 시행 첫해인 2005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이름은 '건강하지 않은 가정'을 떠올리게 해 일부 가정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중립적인 법률명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놓았다. 2006년 17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건강가정기본법의 이름을 '가족정책기본법'으로 바꾸고 가족의 정의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21년 문재인 정부 당시 여성가족부가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년)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하면서 변화의 물꼬가 트이는 듯했다. 여가부는 △법률혼·혈연 중심으로 규정된 가족 관련법의 가족 정의 규정 개정 및 가족 유형에 따른 차별금지·예방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 △결혼제도 밖의 다양한 가족 구성 보장 △친밀성과 돌봄 기반의 대안적 관계(비혼·노년 동거 등)에서 생활, 재산 등 권리 보호방안 마련 등을 정책 과제로 담았다. 하지만 보수 정부인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여가부는 입장을 바꿨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지난해 9월 국회에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현행 유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건강가정기본법 개정 논의는 20년 가까이 지지부진하지만 21대 국회는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기 위한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사람과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권리인 '가족구성권'을 보장하는 법안들이다. 4월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혼인이나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생활을 함께하는 동반자에게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생활동반자법'을 최초로 발의했다. 2014년 당시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초안을 마련했지만 종교계와 보수성향 시민단체의 반대에 막혀 발의조차 못했다. 지난달 31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가족구성권 3법(생활동반자법·혼인평등법·비혼출산지원법)'을 발의했다.
첫발은 뗐지만 법안 통과까지는 첩첩산중이다. 전통적 가족 가치를 중요시하는 종교계는 법 개정이 "가정 해체와 동성혼을 조장한다"며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선 준비에 돌입, 표 계산에 들어간 정치권이 논란이 될 만한 법안을 논의할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표의 득실을 따지며 혐오 정치에 편승하기보다 무엇이 시민들의 삶의 발전에 도움이 될지를 숙고해야 한다"며 입법 논의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