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프로골프협회(LPGA) 깃발을 꽂은 여성들

입력
2023.06.12 04:30
24면
말린 해기(Marlene Bauer Hagge-Vossler, 1934.2.16~2023.5.16)

여성 골프의 역사를 소개한 글들은 으레 16세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를 최초의 여성 골퍼로 앞세운다. 180cm가 넘는 장신으로 사냥 승마 테니스 당구에도 능했다는 그는 10대 때부터 에든버러 세튼(Seton) 궁전 뜰에서 공을 쳤고, 유서 깊은 골프 코스(St. Andrews Links)까지 짓게 했다. 왕권, 특히 메리의 통치를 떨떠름해 했던 귀족주의 역사학자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1506~1582)이 “여왕이 여성에게 명백히 부적절한 운동에 푹 빠져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게임을 보조하는 ‘캐디(Caddie)’란 명칭과 직업도 필드에서 여왕을 시중 든 사관(cadets)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메리는 귀족들 떠세에 밀려 망명해야 했던 왕이었다. 그가 골프를 혼자 했을 리 없고, 서로 못마땅해하던 남자(귀족)들과만 했을 리도 없다. 여러 편견과 사회적 제약을 무릅쓰고 골프를 즐긴 적잖은 여성 골퍼들이 당시에도 있었다. 그 후예들이 300년 뒤인 1867년 최초 여성 골프클럽(St. Andrews Ladies Club)을 만들었고, 미국 뉴욕에선 여성 전용 9홀 코스(Shinnecock Hills, 1891)를 열었다.

하지만 1860년 시작된 브리티시 오픈(The Open Championship)과 US 오픈(1895) 등 메이저 대회를 비롯해 주요 대회는 모두 남성들의 무대였다. 1910년 출범한 PGA투어는 뉴욕 워너메이커(Wanamaker, 현 메이시스) 백화점 창업주 2세(Rodman Wanamaker)가 만들었다. 골프광이었다는 그는 1916년 1월 내로라하는 남성 골퍼 30여명 등을 초청해 프로협회 창립을 제안했고, 그해 10월 뉴욕 브롱스빌 시와노이 컨트리클럽에서 첫 대회를 주최했다. 대회 경비와 상금도 당연히 그가 댔다.

여성 골퍼들에겐 그런 스폰서가 없었고, 버젓한 대회도 드물었다. 그들은 구조적으로 아마추어였고, 프로가 된들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세상은 그들을 “재미 삼아 치는 이들"로 여겼다.
종주국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거의 모든 명문 골프장들은 아예 여성 출입을 불허했고, 토너먼트를 관람하려 해도 뒷문으로나 입장시켰다. 1946년 로열 리버풀 클럽 관계자는 “클럽 하우스에 여성이 입장한 예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00년 미국 모리스카운티의 한 골프클럽이 최초의 여자 골프 선수권대회를 열었지만, 클럽 홍보를 위한 ‘이색 이벤트’ 수준이었다. 1944년 미국의 몇몇 여성 아마추어가 역사상 첫 여성 프로 단체(여자프로골프협회, WPGA)를 설립했지만 5년도 못 버티고 문을 닫은 배경이 대충 그러했다.

지금은 세상이 다 아는 LPGA가 1950년 그런 여건에서, 13명의 여성 창립자들에 의해 출범했다. 1932년 LA올림픽 허들과 투창(금) 높이뛰기(은) 메달리스트였다가 생계를 위해 프로 골퍼로 전향한 ‘20세기 최고의 여성 스포츠인’ 베이브 자하리아스(Babe Zaharias, 1914~1956), 아마추어 대회를 40여 차례 석권하고 여성 프로 골퍼 최초로 57년 상금 10만달러를 돌파한 패티 버그(Patty Berg, 1918~2006), 신장질환으로 투병하다 만 31세에 의사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해 LPGA 2회 우승을 차지한 ‘설립자들의 대모' 오팔 힐(Opal Hill, 1892~1981) 등등.

그들은 WPGA의 단명을 교훈삼아 스스로 회칙을 정해 조직을 꾸리고, 자신들의 돈과 시간을 들여 토너먼트를 기획하고, 대회 일정을 짜고, 외진 지역을 돌며 골프장 업주들을 설득해 대회장을 잡고, 직접 코스를 선정하고, 한 차에 구겨 타고 미국 전역을 누볐다. LPGA를 알리고 대회 관람자들을 모으기 위해 유랑 서커스단처럼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복싱 이벤트 등을 찾아다니며 쉬는 시간 링에 올라가 행사를 홍보했다. 그렇게 그들은 대회를 기획-조직-홍보하고, 그들이 주최한 대회에서 그들끼리 경쟁했다. 그들은 경쟁자이기 이전에 한 팀의 일원이었고, 가족이었다.

그들은 또 빼어난 기량으로 여성 골프에 대한 편견을 깨야 했고, 매스컴과 자본이 여성 골퍼에게 기대하는 얄궂은 관심에도 적절히 부응해야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가능성과 경쟁력, 즉 여성 골프도 돈 내고 볼만한 가치가 있고, 여성 골퍼도 돈 받고 경기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야 했다. 낸시 로페즈, 아니카 소렌스탐, 박세리 등이 걸어온 필드가 그렇게 열렸다. 그들 13명 설립자 중 막내이자 마지막 생존자 말린 바우어 해기-보슬러(Marlene Bauer Hagge-Vossler, 1934.2.16~2023.5.16)가 별세했다. 항년 89세.

말린 해기는 사우스다코타주 유레카(Eureka)에서 프로골퍼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두 딸 중 차녀로 태어났다. 아들을 낳아 프로골퍼로 키우고자 했던 아버지의 실망은 그리 지속되지 않았다. 여성 프로 시대를 예견했던 그는 자신이 못 이룬 꿈과 여성 프로의 비전까지 딸들에게 투사하며, 인근 골프 코스까지 임대해 6살 위 언니 앨리스와 말린을 가르쳤다. 말린은 걸음마를 갓 뗀 3살 반 무렵부터, 아버지가 샤프트를 잘라 짧게 만든 골프채를 잡았다. 훗날 말린은 “인형을 가지고 논 기억이 없다. 너무 바빴다”고 아무 원망도 미련도 없이 말했다. 그는 골프가, 승부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말린이 10살 되던 44년, 가족은 사계절 골프를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다.

그해 말린은 캘리포니아 ‘롱비치시티 보이스 주니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이름처럼 남자아이들을 위한 대회였지만 성별 제한이 없었고, 그는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말린은 결승에서 훗날 프로골퍼가 된 5살 위 어빙 쿠퍼(Irving Cooper)와 맞붙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쿠퍼에게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이기자 그는 내게 말조차 걸지 않았죠. 나중에 알게 됐어요. 여자애가 남자애를 이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요.”

그는 “당시에는 여성이, 특히 어린 여자아이가 골프를 하는 건 무척 어려웠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주 아마추어 골프대회 출전자격부터 만 16세 이상이었고, 골프장은 대부분 ‘노칠드런존(No Children Zone)’이었다. 하지만 유명인사들, 예컨대 앨리스-말린 자매를 무척 예뻐했다는 희극배우 밥 호프의 아내 겸 골퍼 돌로레스 호프(Dolores Hope) 등과 동행할 땐 예외였다.

말린은 ‘당찬 꼬마 선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만 13세 때인 47년 성인 여성 아마추어 메이저 대회였던 US여자오픈 챔피언십에서 8위를 차지했고, 그해 LA여자선수권대회와 49년 미국여자주니어챔피언십에서 잇달아 우승했다. LA대회는 “14세 미만 어린이는 골프장에 입장할 수 없다”는 규정을 지닌 골프장에서 거둔 우승이었다. 주니어대회 직후 열린 전미여자선수권대회에서도 그는 6차례 우승 경력의 글레나 콜렛-베어(Glenna Collett- Vare,1903~1989)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골프기자는 “모든 종류의 샷을 구사할 줄 아는 멋진 꼬마 선수(cool little player)”라고 그를 소개했다. 말린은 그해 AP 선정 최연소 ‘올해의 선수’와 ‘올해의 골퍼’로 뽑혔다.
이듬해, 만 16세의 그가 언니 앨리스와 함께, 어머니 같고 이모 같은 이들과 나란히 LPGA 창립 회원이 된 것은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58년 여성오픈(Women’s Open)서 4위를 한 게 최고 기록이었던 앨리스와 달리, 말린은 1950년 US오픈에서 공동 6위를 차지하며 생애 첫 상금 400달러(1위는 Zaharias, 상금 1,250달러)를 탔다. 52년 플로리다 새러소타 오픈에서 첫 프로 타이틀을 획득했고, 56년 디트로이트 LPGA 챔피언십(현 KPMG Women’s LPGA)에서는 연장 첫 홀에서 패티 버그를 꺾고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상금은 1,350달러(근년 기준 약 1만5,000달러)였다. LPGA를 이끌던 간판스타 자하리아스가 숨진 해였다. 그는 바통을 잇듯 그 해에만 8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9차례 준우승하며 2만 235달러 상금으로 여자 투어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스포츠 흥행은 스타의 부침과 직결된다. 말린 바우어는 여성 프로골프 원년 스타 중 한 명이었다.

타고난 미모에 신장 157cm 남짓의 작고 날렵한 체형으로, 앨리스-말린 자매는 LPGA가이드 등 다양한 골프 잡지 표지모델로도 활약했다. 주니어 시절부터 이름 앞에 ‘귀여운’, ‘사랑스러운’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말린은 전성기 무렵엔 ‘매력적인(glamorous)’ ‘섹시한(sexy)’ 선수로 불렸다. 73년 ‘골프다이제스트’는 그를 “훌륭하고 섹시한(good and sexy)” 선수라 표현했고, 패티 버그도 한 행사 진행 도중 그들을 두고 “저렇게 예쁘고 공도 잘 치다니 대단하지 않나요?”라 했다.

말린은 성별이나 나이 때문에 목표를 낮춰 잡는 법이 없었다. 재미와 명예가 아니라 상금을 노리는 프로 골퍼로 성장한 그에겐 아예 그런 의식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자랄 때는 주니어 골프교실도 없었고 운동하는 여자애도 드물었다. 나는 늘 성인 남자들이나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과 골프를 쳤다”고 말했다.

14개 토너먼트에 총상금 5만달러로 시작한 LPGA 투어는 10년 만에 20만 달러(26개 대회) 규모로 성장했다. 60년대 LPGA를 휘어잡은 미키 라이트(Mickey Wright, 68승)와 케이시 위트워스(Kathy Whitworth, 53승), 흑인 여성으로 윔블던 등 테니스 메이저대회를 11차례 석권한 앨시어 깁슨(Althea Gibson)의 63년 LPGA 합류, 콜게이트-팜올리브사 등 기업 후원이 시작된 70년대, 낸시 로페즈(Nancy Lopez)와 영국 출신 골퍼 로라 데이비스, 일본인 골퍼 오카모토 아야코 등이 경쟁한 80년대 LPGA 세계화 시대, 그리고,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 1994), 캐리 웹(호주, 1996), 박세리(한국, 1998)의 90년대....

PGA 투어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LPGA투어 규모와 상금도 원년 멤버들로선 상상도 못한 규모로 커졌다. 5만 달러로 시작된 LPGA 상금은 2023년 US여자오픈 1,000만 달러를 포함, 총 1억달러(1억140만 달러)를 돌파했다. LPGA커미셔너 몰리 새먼(Mollie M. Samaan)은 “1억달러는 좋은 출발일 뿐 목표는 아니다. 여자골프에는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하며, 그럴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 여성 골프 인구는 전체의 약 25%인 6,660만 명(2021년 기준)쯤 되고, 주니어 골퍼 중 여성 비율은 35%(110만명)에 달한다. 근년의 LPGA 재단은 매년 수천 명의 여자 골프 ‘꿈나무’들을 양성하고 있다.

캐리 웹이 한 시즌 상금으로만 100만 달러를 돌파해 세계 언론의 갈채를 받던 1996년, 만 62세의 말린 바우어는 4개 대회에 출전한 뒤 조용히 은퇴했다. 앞만 보고 달리던 LPGA도 챙기지 못한, 마지막 현역 설립자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그는 언니의 전남편(Bob Hagge)과 55년 결혼해 64년 이혼했고, 95년 전 PGA 프로 어니 보슬러(Ernie Vossler, 2013 작고)와 재혼해, 알려진 바 자녀 없이 해로했다. 그는 메이저대회 1회 우승과 26번 투어 우승 등으로 총 상금 48만 1,023달러를 벌었고, 2002년 LPGA 및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3인 LPGA 설립자에게 세상이, 사실 LPGA조차 제대로 된 관심을 쏟게 한 건 2016년 개봉한 미국 여성 영화감독 샬린 피스크(Charlene Fisk)의 장편 스포츠 다큐멘터리 ‘설립자들(The Founders)’이었다. 말린 바우어 등 당시 생존자 4명의 인터뷰와 자료 영상 등을 통해 LPGA의 시작과 그들의 분투를 소개한 그 작품은 이듬해 애틀랜타 필름페스티벌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과 장편부문 관객상을 수상했다. LPGA와 LPGA 명예의전당위원회는 2022년 3월 명예의전당 헌액 기준을 개정, 설립자 13인 중 최소 활동기간과 성적 등 요건에 미치지 못한 셜리 스포크 등 8인을 명예의 전당 명예부문(Honorary Category)에 헌액했다. LPGA측은 "13인의 창립자들은 열정과 결단력, 선견지명으로 여성 스포츠의 역사를 바꾸고 오늘날 세계 최고의 여성 프로 스포츠조직의 토대를 마련한 진정한 선구자들이었다"고 기렸다.
64년 LPGA투어를 시작해 말린과 함께 경기를 하곤 했던 US여자오픈 3회 우승 경력의 수지 버닝(Susie Berning, 1941~)은 다큐에서 “말린은 나같은 신참들을 어머니처럼 살뜰히 보살펴줘 우리는 그를 어머니라 부르곤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동참한 캐리 웹은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어쩌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