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태고의 주거공간은 동굴이었다. 그곳에서 인류의 문명은 진화하였고 또한 문명의 발전에 상응하여 지하 공간은 변화해 왔다.
지하공간은 항온·항습성, 방음성, 내진성과 같은 환경적 측면과 지상의 자연경관 보존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핀란드에 만들어진 레트레티 아트센터는 지하 30m 암반의 노출과 조명 효과를 통해 마치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핀란드 이타케스쿠스의 지하수영장은 자연 채광과 환기를 고려해서 만든 시설로서 지역 명소이다.
서울에도 특색 있는 지하 공간이 존재한다. 2005년 여의도 환승센터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비밀 벙커는 1970년대 정부 요인들의 비상시 대피용으로 만들어졌다. 보수를 거쳐 한동안 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희궁 뒤의 출입이 차단된 벙커에는 일제가 1944년 만든 길이 110m의 거대한 공간이 있다.
서울시의 설계공모를 통해 필자가 설계한 대방동 벙커 개조사업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대방동의 벙커는 조성 시기가 불분명한 군용 시설이다. 가로 45m, 세로 12m, 높이 10m의 지하 공간은 아파트단지 옆 대방 공원 안에 묻힌 채 완전히 도시에서 숨겨진 공간이었다. 군용 목적이 사라지자 한동안 주류업자가 와인 저장고로 쓰다 이후 공원의 관리용 자재창고로 방치되어 있었다. 주변 20여 개 학교의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기획에서 프로젝트는 출발하였다. 근래 벙커를 활용한 프로젝트들이 주목을 받은 것도 한몫했다. 제주도의 '빛의 벙커'라든지 여의도 벙커를 고친 갤러리가 그러한 사례이다. 하지만 모두 활용 면에서 정적이고 일방향적 관람으로 동적이고 활발한 공동체 소통 공간으로 활용된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벙커라는 비일상적이고 특수한 환경에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할 수 있는 스포츠와 창작활동, 교육과 휴식을 위한 장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주어진 과제였다. 벙커라는 특별한 스케일의 공간이 가지는 특성을 활용해 모두에게 열린 '숲속, 우리들의 비밀기지'라는 주제 속에 입체광장, 길과 방들로 구성된 '작은 지하도시'의 형식을 적용하였다.
도시의 형식을 구성하는 공적인 길과 광장을 따라 연결된 다양한 사적 용도의 방들은 시간이 흘러도 기본 골격은 유지한 채 다채로운 용도로 변용할 수 있다. 상하층으로 구획된 벙커의 바닥 일부를 해체하여 하나로 통합하고 다락을 매달아 세 개 층 공간의 깊이를 만들었다. 1층에는 가상현실을 접목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ICT 스포츠시설과 다목적 공연장을 조성했다. 2층으로 가면 아이들이 다양한 모임과 미디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들을 만날 수 있다. 3층 공중에 매달은 다락 카페는 공중정원을 품는다. 벙커의 앞마당에는 경사지를 활용한 '숲속 음악당'이 생긴다. 녹지화된 스탠드와 앞마당은 공연, 휴식 등 다양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열린 쉼터이다.
지상과 지하를 막론하고 건축 대상인 공간은 '관계 짓기를 위한 틈'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은 집과 일터 사이의 다양한 '틈'들을 얼마나 의미 있게 채우며 살아갈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창의적 놀이터란 아이들이 틈을 찾아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도록 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어린이들은 놀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커간다. 도시와 사회의 다양한 틈 사이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 시행착오를 맛보면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날이 포화하여 더 이상 틈이 없을 것 같은 도시에서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버려진 벙커 같은 다양한 가능성의 여백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시대의 폐기된 다양한 시설은 지역에서 고립된 섬과 같은 영역이다. 이렇듯 폐쇄된 공간을 새로운 공공 문화시설로 탈바꿈하여 과거의 흔적 위에 새로운 삶을 다중적으로 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