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검사라는 직업을 그만두지 못한 채 꾸역꾸역 일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멈추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늘은 왜 선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걸까. 세상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데. 그들은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결과를 낳을 텐데. 지난해 59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권용석 전 검사가 그런 사람이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 고통스러운 암 투병 중 남긴 시와 단상, 거기에 아내 노지향(62) ‘연극공간 해’ 대표의 답글을 담은 에세이 ‘꽃 지기 전에’가 최근 출간됐다. 출간 한 달여 만에 초판 2,000부가 모두 팔릴 정도로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권 전 검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92년부터 10년간 검사생활을 했다. 이후 법무법인 대륙아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9년 전 재산을 털어 강원 홍천에 '행복공장'을 지었다. 감옥 독방을 본뜬 명상 공간으로 모토는 '성찰과 나눔으로 여는 행복한 세상’. 어떤 검사는 정치에 뛰어 들어 권력을 잡고, 어떤 검사는 로펌에서 부를 누리는 동안, 한 검사는 자기 위치에서 묵묵히 일하며 ‘행복’이란 두글자를 마음에 품고 지냈다는 얘기.
권 전 검사가 행복공장을 지은 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입신 출세해 검사라는 길을 걷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로, 흡연, 음주에 몸은 망가졌다. 어느 날 아는 교도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1주일만 수감될 수 있냐”고 물었다. 그곳에 가서 생각에 잠기면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고,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이 모든 것들이 분명해질 것 같아서”였다. 자신처럼 몸과 마음이 지쳐 쉼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독방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변호사로 돈을 벌어 일종의 수련시설인 행복공장을 지으려 했다. 20여억 원이 필요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5억 원 정도가 부족했다. 그의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아무 조건 없이 건축비를 후원했다. 때로 먼저 후원을 요청했고, 거절당해 원망스러운 마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이 선한 검사는 이마저도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내가 많이 편협했고 독선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성찰한다. 2013년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바라 마지않던 행복공장 일에 매진하려던 찰나였다. 이미 위중한 상태로 번진 갑상선암 진단을 받는다.
하고 싶은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해서일까. 책 곳곳에는 아쉬운 마음이 묻어난다. "어쩌면 삶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해야 하는데’ 하면서 미루어 왔던 일들이 지금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계속했던 일들이 그만두어야 할 일입니다. 남은 삶 동안이라도 쉽게, 단순하게 살겠습니다.”
지난해 5월 권 전 검사가 세상을 떠난 이후 행복공장은 부인 노지향 대표가 운영 중이다. 비행을 저지른 소년ㆍ소녀들, 이주 노동자, 기지촌 어르신, 고립 청년들이 주로 머문다. 치유 연극, 청년 캠프, 가족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이곳에 머물며 유서를 태우고 간 사람도 있고, 우울증에서 조금 좋아진 사람도 있고, 그저 머물다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최근에는 그 바쁘다는 고3 학생 24명이 다녀갔다. 노 대표는 “코로나 세대여서 수학여행도 못 갔더라고요. 이대로 졸업하기 안타까워 담임 선생님이 다소 무리해서 데려왔는데, 학생들이 거꾸로 ‘추억이 생겼다. 데려와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라고 했다.
행복공장은 운영 10년 동안 ‘적자’와 ‘간신히 적자는 면한’ 상황을 오락가락한다. 노 대표는 “최근 들어 운영이 다시 어려워져서 더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할 예정”이라고 웃었다. 남편이 보고 싶지는 않을까. “특별히 보고 싶은 순간은 없어요. 투병 생활이 길었고요. 서로 미련도 후회도 없이 할 것 다했어요. 끝까지 우리 둘이 잘 살았고요. 다만 너무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가 없으니까. 이렇게 말 통하고 뜻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그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