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박찬용 삼분의일 CRO
1993년 국내 한 침대 회사가 내세운 광고 카피는 단순 내구재에 불과했던 침대와 매트리스가 과학과 기술개발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킨 사례로 유명하다. 당시 TV 광고에는 이 침대 회사의 연구원으로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 2명이 등장, 인체를 지지하는 매트리스의 성능을 실험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한 세대가 지나간 지금, 침대가 과학이라는 표어는 이른바 슬립테크(Sleep Tech·수면의 질 개선을 돕는 기술)로까지 발전했고, 슬립테크를 표방한 스타트업엔 수면과학을 연구하는 최고경영진이 등장했다. 메모리폼 매트리스로 알려진 기업 '삼분의일'의 박찬용 최고연구개발책임자(CRO·Chief Research Officer) 얘기다. TV 광고 속 하얀 가운 대신 회사 로고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었지만, 그는 오랜 기간 국책연구기관 연구원과 대학 연구교수직을 거친 연구개발 전문가다. 지금은 삼분의일이 매트리스 회사에서 슬립테크 기업으로 도약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침대에 누운 사용자가 '꿀잠'을 잘 수 있을지가 그의 연구 분야다. 박 CRO를 만나 스타트업 연구개발 책임자의 세계를 탐구했다.
-연구개발책임자가 '최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최고경영진에 오른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C레벨에 연구개발책임자가 포함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삼분의일은 2017년 매트리스 회사로 출발했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누워볼 수 있는 체험관, 그리고 매트리스를 둘둘 말아 택배로 배송하는 점 등을 앞세워 브랜드 인지도를 쌓아왔죠. 이제는 숙면을 돕는 기술, 즉 슬립테크 기업으로 포지션을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올해 초 제가 대표로 있던 슬립테크 스타트업 바이텔스를 인수하게 됐고, 인수와 함께 제가 신설된 CRO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최고연구개발책임자라고 하니, 흰 가운을 입고 밤낮 없이 실험실을 지키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현재 연구하고 있는 제품은 무엇입니까?
"슬립테크의 목적은 수면의 질을 개선해 건강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제 주된 업무는 수면의학 분야 연구들 중에서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을 찾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이죠. 현재는 냉온 매트리스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시중에는 주로 겨울에 쓰는 온수 매트리스가 널리 판매되고 있죠. 곧 출시될 삼분의일 스마트 매트리스는 냉수와 온수 공급이 모두 가능한 매트리스로, 온도조절을 통해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또 매트리스에 장착된 센서가 잠자고 있는 사용자의 심박수, 호흡수, 움직임을 측정해 적절한 온도값을 도출하죠."
-온도는 수면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우선 '일주기(日週期) 리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 속에는 '일주기 시계'라는 것이 있어서, 24시간을 기준으로 잠을 자고 깨어나는 리듬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리듬이 깨지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저희는 일주기 리듬을 제어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체온을 조절해, 수면의 질을 개선하려고 하는 겁니다. 잠들기 전 체온을 낮추면 입면 시간(잠드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빨리 잠에 들 수 있죠. 또 체온을 낮추면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분비됩니다. 반대로 잠에서 깨야 하는 시간에는 서서히 체온을 올려주죠. 이처럼 체온 조절은 수면 사이클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매트리스에 장착된 수면센서로 잠자는 사람의 생체신호를 분석하면, 개개인의 일주기리듬에 따라 온도 조절 매커니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슬립테크 분야 창업을 경험하셨다구요.
"제 첫 직장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었습니다. 2000년대 닷컴 1세대 창업붐을 지켜보면서, 공기업 소속이었지만 꾸준히 창업을 고민하게 됐죠. 2010년대 들어서는 원격진료가 크게 유행했고, 저도 관련 분야를 연구했습니다. 집에서 혈압이나 체중 등을 측정하고 이런 정보를 병원으로 보내거나 의사와 화상면담을 하는 등 원격진료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컸던 시기죠. 저도 자연스레 원격진료와 관련된 여러 의료기기를 다루게 됐습니다. 주로 가정용 헬스케어 기기를 연구한 것이죠. 그런데 이런 헬스케어 기기로 창업을 하려고 보니, 가정에서 쓰는 혈당계나 혈압계는 이미 레드오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의 3분의 1 가까이를 보내는 수면을 측정하는 가정용 기기는 개척해 볼만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바이텔스를 창업하고, 수면 측정용 센서를 개발했습니다."
-이미 손목에 차는 시계로 수면의 질을 측정하는 게 보편화됐는데요. 매트리스에 부착하는 수면 측정 센서는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즘 떠오르는 기술이 '캄 테크'(Calm Tech·차분한 기술)입니다. 사용자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센서나 네트워크로 기기를 작동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죠. 센서가 매트리스와 결합돼 있으면, 사용자가 별다른 개입 없이 침대에 눕기만 해도 센서가 생체 정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계는 손목에 차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자는 동안 차고 있으면 충전할 시간도 없다는 게 단점이죠."
-'잠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질 좋은 수면은 건강한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죠. 그런데 슬립테크가 최근에야 부쩍 관심을 받는 배경은 무엇인가요?
"사실 수면의 질을 측정하는 수면임상의학 분야 연구는 예전부터 계속돼 왔습니다. 그런 연구 결과가 실제 제품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단적인 사건이 있었는데요. 2013년 수면 추적기를 개발한 베딧(Beddit)이라는 핀란드 기업이 있었습니다. 핀란드는 북유럽 국가라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있죠. 이 때문에 불면증 환자가 많고, 관련 연구도 활발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베딧은 애플 워치에 적용되는 수면 추적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고, 2017년엔 애플이 아예 베딧을 인수했습니다. 슬립테크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로 떠오른 셈이죠. 점차 기술이 성숙되고 있고 상용화도 가능하며, 스타트업에서도 도전해볼 수 있는 분야로 평가되고 있는 듯 합니다."
-현재 삼분의일은 불면증을 어플리케이션(앱)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디지털치료제를 개발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디지털치료제는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마트폰으로 감기 같은 호흡기 질환도 고칠 수 있냐, 그런 것은 아니고요. 일부 질병들은 환자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자폐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약물중독, 불면증 등이 그런 경우인데, 의사가 절차에 따라 차례대로 지침을 주고 환자가 이에 따르는 식으로 치료 효과를 낼 수 있죠. 이런 과정을 앱 같은 소프트웨어로 옮기는 게 바로 디지털치료제입니다. 불면증 치료 역시 이런 과정을 따르게 되는데, 이런 치료법이 효과를 내려면 환자가 얼마나 솔직하고 성실하게 의사의 지침을 따르는 지가 중요합니다. 우선 환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겠죠. 그런데 센서가 행동을 측정하면,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 없이 환자의 상태가 정확하게 기록됩니다."
-슬립테크의 미래가 궁금합니다. 좋은 잠, 건강한 잠이라는 목표 그 이상의 기술도 개발될 수 있습니까?
"사실 불면증 치료는 단순히 잠자는 시간 동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일입니다. 수면의 질을 결정하는 일주기 리듬도 낮에 햇빛을 얼마나 쬐는지에 따라 좌우될 수 있죠. 또 과식을 하게 되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돼 수면 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식단 관리도 필요할 겁니다. 슬립테크는 좋은 잠을 본질적인 목표로 하지만, 이를 위해 수면 최적화 기술이 침대와 침실을 넘어서 일상생활까지도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슬립테크를 연구할 동료들도 찾고 계시다구요.
"아직은 저 혼자 연구개발을 하고 있지만 추후에 석박사들을 채용해 보다 더 연구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생체신호처리, 수면의학, 불면증 디지털치료제 관련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 삼분의일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