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와서 다른 수형자와 교도관과 얘기를 나누고서야 알았어요. 내 인생은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졌구나. 신이 있을까. 그렇다면 내 운명을 왜 이렇게 정하셨을까."
지난달 9일 경기 이천의 국군교도소. 소지품 검사 뒤 10여 분을 기다리자 접견 창구 건너편으로 한 남성이 들어와 앉았다. 면회 직전 이발을 했다며 멋쩍게 웃는 모습은 여느 30대 청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갈색 수형복과 가슴팍에 붙은 사형수 명찰은 그가 겪고 있는 고단함을 상기시켰다. 그는 19세 나이에 군에서 총기를 난사해 동료 군인 4명의 목숨을 앗아간 '강화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범으로, 그로 인해 2013년 최연소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0년 넘게 복역 중인 '김민찬 상병(사건 당시 계급)'이었다.
사형수에게 고독감은 평생의 숙제다. 김 상병에게는 일반 수형자처럼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한 교육도, 별다른 노역도 허락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시간 남짓의 운동 시간이지만, 긴 수형 생활의 벅찬 무게를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미치지 않기 위해 책을 보거나, 어설프게나마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쓰고 싶은 얘기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답했다. "혹시라도 다음 기회라는 게 주어진다면, 제가 사형수가 된 과정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보고 싶어요. 그 기대 하나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흉악범들의 범행 동기나 스토리를 자세히 공개하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해선 안 되기 때문이고, 핑계 없는 무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교도소 교도관들은 입을 모아 "민찬이는 군대에 갔기 때문에 사형수가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뭘까. 그는 자신과 오랜 기간 소통해온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에게 쓴 편지에서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된 피해자들도, 그리고 나도 불쌍하다"고 밝혔다.
가정학대와 학교폭력, 그리고 군내 가혹행위까지. 김 상병은 사형수가 되기 전까지 피해로 점철됐던 자신의 '희망 없던 삶'을 조곤조곤 풀어냈다. 중학생 때부터 따돌림에 시달렸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동급생들에게 성적 학대와 상습 폭행을 당했다. 일상의 비상식적 폭력에도 부모와 의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가정 역시 치유의 보금자리가 아닌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또다른 폭력의 트라우마였다고 그는 전했다.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었다.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힘을 기르기 위해 해병대를 자원했지만, 그곳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병대에서의 괴롭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구타와 욕설은 물론이고 성적 학대까지 수시로 당했다. 전출을 7번이나 요구하며 발버둥쳤지만 모두 묵살됐다. 인생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할머니 장례식에 다녀온 날, 김 상병은 선임들이 자신의 군모에 소변을 담아 놓은 모습을 봤다. 그는 같이 괴롭힘을 당하던 후임을 다독일 정도로 마음을 다잡기도 했지만,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2011년 7월 4일, '강화도 해병대 제2사단 총기난사 사건'은 그렇게 벌어졌다.
그의 총기난사에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는 유일하게 자신을 친절하게 대했던 선임까지 포함돼 있었다. 재판부도 김 상병이 당한 가혹행위는 상당 부분 인정했지만, "비정상적이고 고질병적인 해병대 문화와 허술한 총기관리 실태는 양형의 문제로 해결할 부분이 아니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고, 되돌리기엔 그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너무나 컸다. "이렇게 살라고 날 만들었구나 생각했어요. 태어나 평생 당하고 살다가, 사형수가 되라고요."
인생이 꽃피기도 전에 '최연소 사형수' 꼬리표를 달게 된 김 상병은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그렇듯 수형 생활 초반 극심하게 방황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는 '최장기 사형수' 원언식씨였다. 간간이 주고받던 편지가 조금이나마 심적 위안이 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 방화 사건'으로 15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씨는 1993년 사형을 확정받아 30년째 복역 중이다. 김 상병은 "그가 워낙 오랜 기간 수형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현실적인 조언을 많이 해줬다"며 "편지를 보내기 전부터 원씨는 날 알고 있었고, 몇 년 주기로 연락해도 '너라도 잘 됐으면 좋겠다'며 잊지 않고 있었다"고 말했다.
원씨는 최근 한국일보와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지은 죄 때문에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되어, 죽은 삶을 살았다"며 "아픔을 당하신 분들의 상처가 30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없어지진 않을 텐데 나로 인해 상처의 아픔이 덧날까 심히 두려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로 인해 작은 마음의 상처도 드리고 싶지 않다"고 전해왔다.
사형의 형 집행 시효는 30년이지만, 형법상 사형확정자의 수용 기간도 시효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선 명시적 규정이 없다. 원씨가 구금된 지 30년이 지나는 11월 23일 그를 석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런 논란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집행 시효 대상에서 사형을 제외하자는 형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상태다. 이에 대해 30년이든 그 이상이든 수형 생활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게 원씨가 전한 속내였다.
원씨와 달리 김 상병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총을 소지하지 않는 의경에 지원할걸',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사형수가 됐구나' 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그 사건 이후로 시간이 멈춘 느낌"이라며 "쾌락과 이득을 좇아 사람을 죽인 다른 흉악범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같은 신분이란 사실이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김 상병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죄와 후회뿐. 그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선후임들을 생각하면 유족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결국 똑같이 소중한 목숨들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짓눌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헌법재판소는 현재 세 번째 사형제 헌법소원을 심리 중이다. 1996년과 2010년 두 차례 심판에선 모두 합헌 결정이 나왔다. 만약 이번에 사형제가 위헌이라는 판단이 나온다면, 김 상병도 다른 사형수들처럼 재심을 받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가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들에게 품은 죄책감과 망쳐버린 인생에 대한 원통함 사이에서 하루에도 열 번씩 마음이 복잡해진다. 다만 군내 총기난사 사건의 특수성을 감안해 다시 한번 법적 판단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잔인하고 가능성 없는 희망이지만 김 상병은 아직 '다음'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영화 시나리오 얘기에 들뜨다가도,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 걸까요"라며 거듭 망설였다. 그럼에도 그는 "엉망이던 내 인생에도 다음 기회가 기적적으로 찾아온다면, 나가서 내 얘기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학창시절 날 괴롭힌 아이들에게도 '덕분에 이렇게 성장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 다시 쓰는 사형제 리포트
<1> 죄와 벌, 그리고 59명의 사형수
<2> 사형제 폐지? 논쟁의 끝은
<3> 두 번의 합헌, 세 번째 결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