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이상화를 본 적이 있다. 경기 시작 한참 전부터 중계 카메라는 경기장을 비췄다. 올림픽 2연패에 빛나는 대선수도 경기 직전의 초조함과 긴장감은 감춰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어폰을 낀 채로 경기장에 나와 몸을 풀다가, 경기 직전에는 큰 헤드폰을 착용했다. BTS의 음악으로 경기 전 루틴을 지킨다고 했다. 선수는 무려 4시간을 그렇게 경기장에서 몸을 풀었고, 주 종목인 500미터의 레이스는 겨우 36초 만에 끝이 났다.
마취되어 누워 있는 환자 옆에서 칼을 쥔 집도의(執刀醫)를 떠올려 보자. 그의 긴장감은 어떤 수준일까? 큰 시합 직전의 운동선수나 큰 무대를 앞에 둔 예술가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잘못되면 나의 실패로만 끝나지 않는다. 수술은 그 수술의 대상인 환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긴장의 강도는 훨씬 더하다. 칼을 쥔 자는 그 수술의 책임자다. 날카로운 칼이나 그것보다 더 발전된 수술 도구는 집도의가 원하는 곳으로 예리하게 향하는데,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가 미끄러지듯 별다른 저항을 경험하지 않는다. 마취된 환자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신경이 자극되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은, 받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하는 사람에게도 무섭고 떨리는 일이다. 수술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수술이 끝나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다. 환자의 말, 표정, 통증 정도, 움직임, 여러 가지 활력징후와 검사 결과가 정확한 성적을 알려준다. 암 수술의 경우에는 근치적(根治的) 수술 후, 5년까지 환자가 재발을 경험하지 않아야 성공이다.
경험이 적은 집도의에게, 수술이란 섬세한 육체노동이면서 지독한 지적 노동이다. 여기가 맞는 길인가? 이 조직은 잘라도 되는 것인가? 여기 넘으면 그곳이 나올까? 매 순간 스스로와 환자의 몸에 대해 의심한다. 환자마다 해부학적 구조가 다르고, 병의 위치도 다르다. 저 너머의 공간으로 나아가려면 손끝에서 직면한 전투를 우선 끝내야 한다. 불행하게도 모든 행동이 확신의 결과는 아니다. 그럼에도 과감한 행동이 있어야 전투는 시작되고 전선은 넓어진다. 의심이 가득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햄릿형 인간은 제자리에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결과도 이뤄낼 수 없다. 외과 의사의 수련은 결행의 순간에서, 막연한 긍정 혹은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을, 성공의 경험이 적립되어 생기는 자기믿음으로 대체해 가는 과정이다. 좋은 선생님, 손이 맞는 동료가 곁에 있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확신에 찬 전투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매우 벅찬 일이다.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전투.
학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어떤 선배님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수술할 때, 정확한 것과 빠른 것의 조합 중 최상은 무엇인가? 정확하고 빠른 수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정답이다. 그렇다면 최악은 무엇일까? 부정확하면서 느린 수술?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답을 했는데, 아니라고 한다. 그런 의사는 수술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발전의 여지가 충분하다. 최악은 부정확하면서 빠른 수술이다. 스스로가 수술을 잘한다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배움에 게으르고 개선의 동기가 없다. 늘 반성 없는 부정확함의 해악을 남긴다. 그것도 저항할 수 없는 타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