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가 된 계기는 1944년 체결된 브레턴우즈협정이다. 협정에선 금과의 태환을 보장하는 통화를 달러로 정하고, 금 1온스에 35달러를 고정 교환비로 설정했다. 달러는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이 됐다. 하지만 미국은 점차 금 보유량보다 많은 달러를 발행하게 됐고, 1971년 달러 가치가 크게 하락하자 영국 등 유럽 각국들이 보유 달러의 금 태환을 줄줄이 요구하고 나섰다.
▦ 다급해진 미국의 대응이 당시 닉슨 대통령이 전격 발표한 ‘금 태환 중지’ 선언이었다. 요컨대 달러를 제시하면 언제라도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브레턴우즈협정의 일방적 파기인 셈이었다. 달러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기축통화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세계 GDP의 40% 가까이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했고, 달러는 미국 국채를 담보로 발행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미국 국채가 달러 가치를 보장하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형성됐던 것이다.
▦ 미국 경제는 그 이후에도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로 고질병을 앓아왔으나 국채 가격만은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했다. 일례로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982년 16%였던 게 최근 3.5%대 정도까지 지속 하락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장기 양적완화 정책 시행에 따라 달러를 증발하느라 올해 예정분을 포함해 무려 9조5,000억 달러 규모의 국채가 새로 발행됐다.
▦ 이렇게 공급은 급증한 반면, 수요는 약화했다. 2013년만 해도 약 31조 달러 규모인 누적 미국 국채 중 해외 보유분이 50%에 육박했으나, 최근엔 각국 중앙은행 등이 보유를 줄이면서 3분의 1 규모로 위축됐다. 결국 미국 국채 가격은 급락했고 급기야 지난 3월엔 보유 국채 가격 하락을 못 버틴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기에 이르고, 최근엔 국채 추가 발행 여부를 두고 미국 민주ㆍ공화 양당이 벼랑 끝 대치 국면까지 맞게 됐다. 미국 정부가 디폴트까지는 안 가겠지만, 그럼에도 미국 국채 약세와 달러 신뢰도 하락은 불가피해진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