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살에 가족을 탈출했다, 그렇게 나를 지켰다"

입력
2023.05.19 11:00
12면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8>탈가정 청년 배혜림

편집자주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동생 폭력이 도화선, 부친은 “맞을 만했겠지”
“내가 안전하지 않다면 떠나는 게 살 길...
당신에게는 선택할 힘이 있어요”


‘이곳에서 나는 안전하지 않다.’ 배혜림(36)씨가 스물일곱이던 2014년 스스로 가정을 나온 이유다. 가출이나 독립과는 다르다. 몸만 집을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그는 정서적으로도 자신을 분리시켰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발단은 남동생의 폭력이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개막식날이었다. 집엔 둘만 있었다. 새벽 3시 동생은 개막식을 보겠다고 거실 TV를 틀었다. 좁고 오래된 집에서 방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잠 좀 자자”고 소리쳤다. 말싸움은 몸싸움이 됐다. 그때의 혜림씨 체중은 스트레스로 55㎏까지 빠진 상태. 190㎝ 키에 100㎏ 남짓하던 동생이 순식간에 혜림씨의 두 팔을 붙잡고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동생은 그를 침대로 넘어뜨렸다. 아찔한 생각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다행히 폭력은 거기서 멈췄지만, 겁에 질린 혜림씨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12시간 넘게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방 안에 머물렀다. 인기척이 없는 틈을 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탈(脫)가정’의 시작이다.

그날의 사건은 도화선이 됐을 뿐 그의 마음 안에서 가족은 해체된 지 오래다. 5월은 가정의 달. 그는 ‘가정’이라는 말에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공허한 느낌이에요. 가정, 가족 이런 단어는 저한테 빈 단어예요. 정의 내리지 못한 상태의 말들이죠. 남들에게는 존재하지만, 나한테는 없는 것.”

‘엄마’나 ‘아빠’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부를 일이 없는 호칭’이란 생각에 마음이 무너지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홀로서기를 결정한 혜림씨를 만났다.

[실패①] 원가족과 나를 분리시킨 날

혜림씨를 알게 된 건 282북스가 올해 2월 펴낸 ‘탈가정 청년 사례집’에서다(박스 참조). 혜림씨는 참여자 중에서도 탈가정 기간이 9년으로 가장 긴 축에 속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했다.

혜림씨의 삶은 ‘탈가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얘기는 집을 빠져나온 9년 전의 그날부터 시작된다.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던가요.

“두 손목을 봤는데 힘줄이 죄다 튀어나와서 퉁퉁 부었더라고요. 인대가 늘어난 거예요.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남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 힘줄이 이렇게 다 곤두서고 인대가 늘어날 정도로 죽을 힘을 다해 막았구나.’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간단한 짐만 챙겨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 방문을 열고 나와 집 밖으로 뛰었어요. 택시가 보일 때까지.”

그가 간 곳은 가정폭력 쉼터였다. 그곳도 그를 보듬어 줄 수는 없었다. 가정폭력 쉼터는 대개 배우자에게 폭행을 당한 기혼 여성들이 찾는 곳이다. 쉼터에서도 난감해했다.

“한 달간 매일 울기만 했어요. 쉼터는 낯설고, 그렇다고 갈 곳은 없고요. 아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쉼터에서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는데 우울증 소견이 나왔죠.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병원도 너무 무서웠어요. 두 달 가까이 되자 쉼터에서 ‘얼마나 더 여기에 있을 거냐’고 묻더군요.”

대책을 세워야 했다.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로 디자인을 해 모아둔 돈을 따져보니 중소 도시에 원룸 하나는 얻을 만했다. 다행히 적당한 도시에서 취업이 됐다. 방을 구하고 용달차를 불러 집에 갔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엔 아빠도, 남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는 사람도, 어디서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용달 기사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트럭에 실은 뒤 열쇠를 현관에 두고 나왔다. 그게 마지막이다. 2014년 8월 7일, 비가 거세게 내리던 날이었다.

-탈가정을 한 뒤에 ‘내가 과민한 것 아닌가’ ‘좀 더 참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를 한 적은 없나요.

“1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그때 그냥 참았으면 넘어갔을까’ 자문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내 두 손목이 말해 주더라고요. 아직도 무거운 물건을 들 때 후유증이 있거든요. 내가 죽을힘을 다해 동생이 나를 해치는 걸 막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죠.”

-그 뒤로 아버지한테는 연락이 없었나요.

“잠잠하다가 어버이날이나 명절만 되면 문자메시지가 오더라고요. 계속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 2년쯤 지났을 때 너무 화가 나서 ‘그때 동생이 나한테 그렇게 했다고 했을 때는 가만 있지 않았느냐’고 따졌더니, 아빠가 ‘맞을 만하니까 맞았겠지’라고 했어요. 그때 앞으로 절대 가족을 찾거나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한번 결심했죠. ‘내 탓도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도 그 뒤로는 안 하게 됐어요. 아빠의 그 한마디가 그나마 있던 부담감도 다 털어버리게 했죠.”

[실패②] 균열의 시작

-가족 공동체의 실패인데, 우리 가족은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엄마, 아빠가 결혼한 것부터 실패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엄마가 그랬어요. 우리는 그냥 둘 다 나이가 들어서 결혼해야 하니까 선을 봐서 한 거라고.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나 동생한테도 그런 표현을 한 적이 없죠. ‘사랑이 없는 시작’, 이게 우리 가족의 첫 실패인 것 같아요.”

IMF 구제금융 위기 때 닥친 명예퇴직 여파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부모의 사이도 악화했다. 어머니가 장사를 해보려다 사기를 당한 데 이어 주식에 투자한 돈마저 날렸다. 어머니가 갑자기 집에서 사라진 건 그가 열여덟 되던 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부모는 혜림씨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법적으로는 이혼한 상태였다.

“그날도 엄마와 아빠가 싸웠어요. 나중에 경찰이 왔는데 아빠가 ‘이미 남남이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두 분이 이혼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그런 뒤에 학교 갔다 돌아왔는데 엄마도, 엄마 짐도 없는 거예요. 그해 엄마 생일에 제가 사드린 니트만 옷장에 덜렁 걸려 있었어요. 노란색과 하얀색 줄무늬의 그 니트가 아직도 생생해요. 왜 그것만 놓고 갔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죠. 아빠가 엄마를 쫓아냈다고 생각했어요. 두 사람 모두에게 분노가 컸죠. 자식한테도 분명히 얘기해야 하는 상황인데 두 사람 누구도 설명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나요.

“물어본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할 정도로 아빠를 무서워했어요. 얼마 뒤 어느 날 아빠가 주소를 적어 주면서 학교 끝나면 거기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사전에 말도 없이 이사를 한 거죠. 늘 그런 식이었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은 어땠나요.

“어릴 땐 혼났던 기억뿐이에요. 엄마가 과자를 사줘서 먹으면 과자 먹는다고 혼나고, 숨바꼭질 하다가 장롱 안에 숨은 동생이 잠이 들어 찾지 못해도 혼났죠. 칭찬을 들은 적이 없어요. 열 살 무렵 마루에서 아빠와 동생, 제가 누워서 자려는데 아빠가 갑자기 제게 ‘너는 정말 쓸모가 없다. 그렇게 무지해서 어떻게 살래’라고 하는 거예요. 돌이켜보면 저는 아빠에게 ‘먹여 살려야 하는 또 하나의 입’이었던 것 같아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까 아빠도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런 표현을 자주 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에겐 참 잔인했어요. 나는 아빠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 같았거든요.”

-어머니와는 관계가 어땠나요.

“엄마는 결혼을 하면서 고향과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어요. 그러니 아는 사람도, 속 얘기를 할 상대도 없었죠. 어릴 때부터 제가 엄마 얘기를 들어줬어요. 양가감정이 들었죠. 나는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애인데, 되레 엄마를 위로해 줘야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사라진 뒤로는 다시 보지 못했나요.

“저를 보겠다며 갑자기 학교로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엄마가 좀 이상했죠. 그때 이미 조현병이 시작된 것 같아요. 종이 울려 수업이 시작됐는데도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서 교실에 우두커니 서서 나가질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해도 요지부동이었죠. 견딜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제가 책가방을 싸서 학교를 뛰쳐나갔어요.”

고등학교 시절 그의 성적은 지방국립대 어디든 안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일 이후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친구들도 놀랐다. 학교가 싫어서라기보다는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 시절 그에겐 늘 분노와 슬픔이 가득 차 있었지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자퇴를 하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공부는 알아서 할 테니 그림만 그리게 해달라”는 그의 말에 아버지는 자퇴를 허락했다. 미술학원에 들어갔지만 아버지는 가정형편을 이유로 들어 면제 혜택을 받게 해달라며 학원비를 내지 않았다. 몇 달 뒤 부원장은 그를 불러 “우리가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모욕적이었지만, 학원마저 그만둘 수 없었기에 꾹 참았다. 이후 그는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얻은 뒤 기숙사가 있는 다른 지역의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엔 성적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버텼다. 지금은 원가족이 사는 지역과 다른 도시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실패③] 부모처럼 내가 나를 대할 때 깨달았다

-가족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가족이라면 좋으나 싫으나 보듬었어야 하는데 가족 구성원 누구도 그러지 않았어요. 엄마의 (조현병) 상태가 얼마나 나빴든 아빠에겐 엄마를 품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죠. 바로 내쳤으니까요. IMF로 경제 사정까지 나빠진 이후엔 정말 온 식구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대했죠. 제가 탈가정할 무렵에는 세 식구만 살았는데도 ‘이러다가 무슨 일이 나지’ 싶을 정도였어요. ‘가족이니까 함부로 해도 돼’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린 집 같았죠.”

-원가족의 해체, 실패가 자기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원가족과의 관계가 저한테도 영향을 줬다는 걸 느껴요. 부모가 나를 대한 방식으로 내가 나를 대한다는 걸 느낄 때가 있거든요. 나의 에고(ego)가 아빠와 비슷한 거예요. 내가 뭘 잘해도 스스로 칭찬해주지 않아요. 반면 잘못하면 ‘이 등신아, 그러니까 네가 그거밖에 안 되는 거야’라면서 나를 채찍질하죠. 원가족과의 관계가, 내가 나와 관계 맺는 것 자체도 어렵게 만든다는 걸 느꼈어요. 나아가 이것이 내가 아끼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더라고요. 자꾸 마음을 확인하려 하고 시험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데서 오는 관계 맺기의 실패죠.”

-탈가정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독립해 원가족과 단절된 상태라고 생각해요. 철저하게 원가족과 분리돼 사는 삶의 형태죠. 탈가정이라는 말은 2019년에야 알았어요.”

-탈가정하고 난 뒤 가장 막막했던 건 뭔가요.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요. 청소년이나 가정폭력 피해 여성은 그래도 쉼터가 있어요. 그런데 저 같은 탈가정 청년의 경우엔 어딜 가나 애매하더라고요. 대부분 갑작스럽게 뛰쳐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속옷조차 챙기지 못하고 나왔다는 친구도 있어요. 혹여 아프거나 신변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법적으로 저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회복지제도를 이용하기도 어렵죠.”

-탈가정 청년 중엔 원가족에게서 원치 않는 연락을 받아 힘들어 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저도 탈가정하고 나서 2년쯤 지났을 때 급작스럽게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엄마가 흉기를 들고 다녀 주민들이 신고한 거였어요. 경찰은 엄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면 입원동의서가 필요하니 제가 직접 와서 써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이혼했고) 남동생은 연락이 안 된다면서요. 저도 우울증 치료를 받는 중이라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너무 화가 났죠. 그때 엄마가 조현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엔 이런 서늘한 대사가 나온다. “동사무소 가서 서류(주민등록 등본) 한 장 떼면 너 어딨는지 다 나와. 어디 또 숨어봐.” 주인공 동은(송혜교)의 최초 가해자인 엄마의 협박이다. 어떻게 해서든 엄마에게서 분리되고 싶지만, 동은은 그럴 수 없다.

어떤 때 가족은 끊어낼 수 없는 족쇄다. 물론 가정폭력 피해 사실을 입증할 만한 서류(가정폭력 상담 기록, 쉼터 입소 증명 서류, 경찰 신고 기록, 법원의 확정판결문 등)를 제출하면 주민등록 등ㆍ초본 발급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탈가정 청년 중엔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글로리’의 동은처럼.

-탈가정과 독립이 뭐가 다르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인생을 살다가 무슨 일을 당해도 기댈 존재가 없다는 것. 어버이날이나 명절에도 저는 덩그러니 혼자 있어야 해요. 정말 이제는 내 뒤를 봐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막막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거예요.”

-그때 탈가정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시기의 문제였을 뿐 언제든 나왔을 거예요. 그때 우리 가족의 분위기는, 정말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늘 서려 있을 정도로 날이 서 있었거든요. 아빠나 동생이 무서워 저는 방 안에선 늘 문을 잠그고 있었어요. 그 어떤 강력한 접착제로도 붙일 수 없는 관계였죠. 감옥에 갈 만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출소해서 사회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가족의 사랑이잖아요. 우리 가족은 그런 게 없었죠.”

[실패란] 내 인생 망한 거 아니야

-혜림씨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족은 뭔가요.

“서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관계요. ‘내가 이만큼 다가가고 싶은데 괜찮아?’라면서 끊임없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면 좋겠어요. 그런 관계가 건강한 것 아닐까요.”

-원가족의 실패로 얻은 건 뭘까요.

“저는 가끔 역할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의 아이이자 부모이고 가장이라고. 한때는 가족의 결핍을 외부에서 해소하려고도 했어요. 예를 들어, 남자 친구가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거죠. 그러다 보니 결말이 비참해지더라고요. 내가 내 인생을 오롯이 책임지기로 선택한 것이니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야 하는 거죠.”

-원가족과 관계의 실패로 얻은 삶의 도가 있나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거요. ‘가족이니까 당연히 해주겠지’라는 건 없어요. 그런데 남은 오죽하겠어요. 남이 내게 무언가를 베풀든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고, 다 감사한 일이라는 걸 알았죠.”

-자신만의 언어로 실패를 정의해 본다면 뭘까요.

“실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닐까 해요. ‘그럼에도 내가 이걸 계속하고 싶어. 그럼에도 재도전할 거야’라는 의미예요. 실패했다고 해서 홱 내팽개칠 수 없는 게 인생이잖아요. 인생은 리셋이 안 되니까요. ‘나는 내 원가족과 이렇게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망한 거 아니야’라고도 생각하고요.”

-원가족과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원가족이니까 당연하게 견디고 얼굴 보며 살라는 법은 없어요. 당신한테는 선택할 힘이 있어요. 그 관계를 지속할지, 끝낼지, 다른 방식으로 바꿔 볼지. 선택지는 많아요. 그중에서 자신한테 가장 좋은 걸 고르세요.”

-혜림씨는 가장 좋은 걸 골랐나요.

“(끄덕끄덕) 네. 그때처럼 괴롭진 않으니까요.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쁘고 힘들지만 편안해요. 이거면 충분해요.”

그는 자신의 그림 중 꽃을 가장 아끼고 좋아한다. 탈가정을 결심하던 해 봄, 꽃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다. 가족과의 관계로 늘 신경은 곤두서 있고, 손톱으로 몸을 쥐어뜯는 자해 행동을 할 때다. 마음에도, 몸에도 여기저기 핏자국 어린 생채기가 났다. 살기조차 싫었을 때니 그에게 세상은 회색빛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화단에 피어난 노랗고 빨간 튤립을 봤다.

“저마다의 색을 내면서 환하게 살아 있는 여린 꽃들을 보니까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자신이 그렸던 꽃들을 작업실 벽에 붙이며 말했다. 금세 정원이 됐다. 그의 그림처럼 그의 삶도 따뜻한 빛깔 가득한 정원으로 오롯이 키우기를.

사각지대에 놓인 ‘탈가정 청년들’
전문가들은 ‘탈가정 청년’을 2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는 없다. 행정은 통계를 따라간다. 통계에 잡히지 않으니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삶의 방식이자 주거의 형태다. 민간에서 진작 연구가 시작된 이유다. 282북스가 올해 2월 탈가정 청년 60명을 심층 조사해 펴낸 사례집 ‘궤도이탈; 청년 독립 선언’도 그중 하나다. 282북스는 청년 소수자의 치유와 자립을 돕는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사례집에 따르면, 탈가정을 선택한 주된 이유는 ‘정서적 학대’가 91.2%로 압도적이었다(중복 선택). ‘가정폭력’(59.6%), ‘방임’(36.8%), ‘성 정체성 아우팅’(7%) 등의 이유가 뒤를 이었다. 탈가정 이후 가장 어려웠던 점으로 응답자들은 ‘경제적 어려움’(74.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심리적 불안’(18.2%), ‘물리적 공간의 어려움’(1.46%) 순이다. 탈가정 청년들은 대개 긴박한 상황에서 준비 없이 집을 나와 상황이 더욱 녹록지 않다. 당장 머물 곳조차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기도 어렵다. 대부분 원가족 소득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주거가 다른 만 30세 미만의 청년은 1인 가구로 인정되지 않아 국민기초생활수급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도 없다. 가정폭력 피해자라면 입건 등 이력이 있어야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조건과 과정이 까다롭다.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려 해도 부모의 소득 기준을 제출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응답자들은 “경제적 지원을 받기엔 원가정 소득에 걸린다” “취직한 상태가 아니라 세대주 인정을 받지 못했다” “청년 지원 제도도 부모의 동의나 신청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2021년 ‘청년정책 사각지대 발굴을 위한 탈가정 청년 실태조사’를 실시한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은 보고서에서 ‘가정폭력, 파산 등 다양한 이유로 원가족과 갑작스럽게 단절돼 긴급하게 자립해야 하는 상태에 있는 청년’을 ‘탈가정 청년’으로 정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 연구단체는 “탈가정이라는 의제는 미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며 “청년 의제를 통한 미래 대응을 위해 지원할 필요성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김지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