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방문 계기는 뜨선시에서 경북 봉화군과 화산이씨 종친회에 보낸 초청장이었다. 5월3일과 4일 해당 지역에서 ‘덴도(DO-temple)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베트남 최초로 중국의 책봉 시스템에서 벗어나 황제를 세운 '리(Ly) 왕조(1009~1225년)'의 여덟 황제를 기리는 행사다. 매년 리태조의 즉위 기념일인 음력 3월14일에서 16일까지 축제를 연다.
봉화군은 지역에 조성할 ‘베트남 타운’과 관련해 뜨선시와 박닌성의 지지와 응원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화산 이씨는 왜 초청하느냐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교류와 사업 기획의 출발점에 화산 이씨가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용상(1174~?)’이라는 화산 이씨 중시조의 존재가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다.
베트남식으로 '리롱뜨엉(Lý Long Tường)'으로 발음되는 이용상은 영종(李英宗)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나 800여 년 전 (박닌성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6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화산 이씨 족보에는 이용상이 부하들과 함께 옹진에 진격해온 몽골군 부대를 막아낸 것을 계시로 고려로부터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5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맺고 화산군의 후손들이 덴도 사원을 처음 방문했을 했을 때, 사원 주변의 노인들이 "리 왕조의 후손이 돌아오면 베트남이 부흥한다"는 전설이 있었노라고 알려주었다. 수교 이후 베트남이 본격적으로 발전을 했으니 아주 틀린 전설은 아닌 듯하다. 그 중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이 컸다. 현재 삼성전자가 베트남 GDP의 24%를 차지할 정도로 큰 기여를 하고 있고, 수도인 하노이에서 박닌성의 박닌시로 출근하는 통근버스만 매일 900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관광과 경제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박항서 감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박 감독이 베트남 축구팀을 이끌 때 화산 이씨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필자도 그의 팀이 축구 시합을 할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응원을 했고, 그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꽃다발을 들고 인천공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박항서'가 아니라 '이항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가 화산 이씨든 아니든 베트남인들은 그의 업적을 '리 왕조'의 전설과 연결시키게 되리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베트남인들에게는 국기나 다름없는 축구의 부흥도 경제 발전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다. 박항서 감독이 쓴 스포츠 신화도 '리 왕조 후손이 돌아오면 베트남이 부흥할 것'이라는 전설이 실현된 한 가지 예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박현국 봉화군수는 지난 4일 부엉꾸억투언(오른쪽) 박닌성 상임부성장을 만난 자리에서 7월29일부터 8월6일 사이에 열리는 봉화은어축제 기간에 ‘베트남의 날’을 제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엉꾸억투언 부성장은 “미술작품을 비롯해 전통민요 및 수상연극 팀을 보내겠다”고 화답했다. 은어축제 기간에 열리는 ‘베트남의 날’이 베트남 타운 조성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이자 봉화와 박닌성이 베트남과 한국의 교류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의 날'을 품게 된 은어축제 역시 화산군의 삶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은어는 먼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고향의 개울로 돌아오는 물고기다. 바다 건너 홍강의 풍광을 사무치도록 그리워했을 화선군의 은유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하다.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귀향에 대한 여망이 오늘날 두 나라의 우호의 바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은어떼가 강과 바다를 무한히 순환하는 것처럼, 리 왕조의 고향인 박닌성과 그의 후손들이 정착한 경북 봉화군 사이에도 교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