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인들은 신을 만나기 위해 깃발(다르촉, 經幡)을 건다. 신이 바람 전령(傳令)으로 깃발을 흔들어 거기 적힌 경전을 읽어주기 때문이다. 기독 신의 전령은 빛이다. 그래서 성당 창에는 그림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을 타고 오는 신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변환시켜주는 공감각적 번역기. 창의 닫힘은 채널의 열림을 상징한다.
그렇게 굳게 닫힌 성당 창을 처음 연 이가 교황 요한23세(1958~63 재위)였다. 그는 취임 직후 “교회도 이제 창을 열고 환기를 좀 하자”며 전 세계 가톨릭 고위 사제와 신학자들을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 초청, 2000년 교회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사건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62~65)’를 열었다. 스위스 신학자 한스 퀑(1928~2021)을 소개하며 간략히 살펴본 가톨릭 개혁이 그렇게 시작됐다. 2차공의회는 차별(인권) 전쟁(평화) 등 여러 현대 사회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그 고민의 응답이 60년대 말 본격화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운동이었고, 기독교 사회주의와 민중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등이었다. 1974년 출범한 한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2차공의회의 결실 중 하나였다.
호주 신부 밥 맥과이어(Robert John Thomas Maguire, 1934.9.14~2023.4.19)도 1960년 사제 서품을 받은 공의회의 아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주 멜버른 교외의 여러 가난한 교구를 터전 삼아 고위 사제들과 불화하며 근 평생을 소외된 이들에게 헌신했고, 유쾌한 위트와 거침없는 독설로 “낡은" 교회와 정치를 비판하곤 했다. 시민들에게는 코미디언을 방불케 한 괴짜 논객이었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마더 테레사였고, 일부 정치인과 성직자들에게는 구약의 성난 예언자였던, ‘악동 사제(larrikin priest)’ 밥 신부가 별세했다. 향년 88세.
그는 멜버른 교외 빈민 마을 손버리(Thornbury)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 부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영국 상선해군으로 1차대전을 치른 뒤 23년 호주에 정착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폭력 가장이었다. 그의 폭력은 살갗이 찢겨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이어지곤 했다. 대상은 주로 어머니였지만, 아이들도 아주 예외는 아니었다. 밥의 기억에, 그가 아버지의 관심을 받은 것도 "벨트를 풀어 나를 때릴 때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런저런 푼돈 벌이로 힘겹게 가족을 건사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이혼은 천벌받을 일이었다.
밥은 겁 많고 소극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형에게서 물려 받은 구멍 난 옷을 형의 외투로 가리고 다녀야 했던 학교에서도 그는 대체로 외톨이였다. “아침에 일어나야 할 이유조차 찾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런 그를 세상 속으로 이끈 게 교회였다. 블랙록 교구 신부 제임스 맥휴(James McHugh)는 초등 3학년이던 그를 제단 소년으로 임명하고 교회 화장실 등 청소를 맡겼다. 그렇게 밥은 자신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고 한다. 2차대전 전시였다.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또래들과 전쟁놀이도 하고, 풋볼 팀을 만들어 시합도 벌이면서 비로소 '아이'가 돼갔다.
집에는 누나 캐슬린이 있었다. 늘 노동으로 바쁘거나 지쳐 있던 어머니를 대신해준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그 누나가 45년 급성 폐결핵에 걸려 한 달 만에 숨졌다. 3년 뒤 아버지도 숨졌고, 진짜 아버지 같던 맥휴 신부도 같은 해 별세했고, 뇌졸중으로 누워 지내던 어머니도 2년 뒤 늑막염으로 세상을 떴다. 만 15세 밥은 그렇게, 배고파도 푸념조차 할 데 없는 고아가 됐다.
재향군인회 도움으로 어렵사리 고교를 졸업한 밥에게 신학대(Corpus Christi College) 진학은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당장 재학기간 8년간(53~60년) 숙식이 해결되는 길이었다. 학교에서 목공과 양봉 기술도 익혔다. 그는 벌을 돌보며 꿀을 얻던 시간을 “내 평생 가장 좋았던 한때”로 기억했다.
하지만 신학대 일상은 “죽고 싶을 만큼 따분”했다. 300년 전 예수회가 사제 양성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기도- 미사- 라틴어 성경 공부- 신학·철학 수업- 고해성사- 침묵의 끝도 없는 반복. 그는 그 시절의 신학대를 ‘공동묘지’라고 칭하곤 했다.
그를 숨 쉬게 해준 게 벌들이었고, 외래교수들의 드문 강연이었고, 미국의 도로시 데이(Dorothy Day), 캐나다의 장 바니에(Jean Vanier),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빈민 사제 아베 피에르(Abbe Pierre) 등의 책이었고, 먼 바티칸의 풍문이었다.
그는 만 25세 때인 60년 7월 사제 서품을 받고 73년까지 멜버른 교구 외곽의 가난한 교회 7곳에서 부제로 사역했다. 그 무렵부터 그는 마을과 병원, 학교 등을 다니며 로만칼라를 벗고 스스럼 없이 사람들을 만났고 그러다 보수적인 주임신부 눈밖에 나서 교회를 옮겨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가 콜링우드(Collingwood) 풋볼클럽 팬클럽 ‘맥파이스(Magpies) 서포터스’가 된 것도 하이델베르크 성당 부제 시절이었다. 맥파이스 서포터스들은 대부분 차별-배제의 상처를 공유한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이었다.
60년대 중반, 교단이 그를 중등 미션스쿨 교목으로, 베트남전 파병 신병 훈련소 군목으로 발령낸 것도 어쩌면 그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만 16세 때 교목으로 밥을 만났다는 한 시민(Michael Doyle)은 “당시 그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장시간 우리를 사로잡곤 했다”고 말했다. 군목 시절에도 그는 형식을 팽개치고 야전 지프 보닛을 제단 삼아 핍박 받던 초기 교회 신자들의 우애와 예수-12사도의 유대를 전우애와 대비시키며, 누구도 방관하거나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강조하곤 했다. 그는 군목생활 8년(65~72) 동안 사제로서 갖춰야 할 질서와 조직력, 협동심, 리더십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베트남전이 멈춘 73년 1월, 멜버른 대주교는 그를 남부 빈민가 성베드로-바오로 성당 주임신부로 임명했다. ‘갱들의 게토’라 불릴 만큼 악명높던 교구여서 교단은 겁 없는 사제가 필요했다. 대주교는 만 39세의 밥 신부에게 교구 부흥을 요청하며 영구 보직을 약속했다.
밥 신부는 빠듯한 예산과 헌금·후원금으로 노숙자와 중독자들, 빈민가 아이들에게 쉼터와 밥을 제공하고, 체육관과 댄스 스튜디오를 열고, 간이 의료시설과 농장을 마련했고, 일부 아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 79년엔 그 일을 전담하는 ‘열린가족재단(Open Family Foundation)'을 설립했다. 스스로 ‘밥의 부대(Bob squad)‘라 칭한 자원봉사자들이 그를 거들었다. 밥은 그들을 '동지들(comrades)'이라 불렀다.
1991년 멜버른 홈리스 실태 고발 다큐멘터리 'Down City Streets'를 만든 다큐 작가 스티븐 루비(Stephen Luby)는 밥과 그의 '동지들' 덕에 “관음증의 상징이던 방송 카메라를 들고도 인터뷰이들의 신뢰를 받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다고 말했다. 100여 명의 노숙자와 트랜스젠더 성노동자, ‘도둑맞은 세대’ 원주민 청년들의 인터뷰 영상을 편집하며, 그들의 진솔한 고백에 흐느껴 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던 그는 원주민 청년 아치 로치(Archie Roach)와 그의 파트너가 노숙 생활의 체험을 담아 만든 노래 ‘Down City Streets’를 테마곡 겸 다큐 제목으로 썼다. 그는 밥의 첫마디를 기억했다. "사제들은 교회를 '너희의 어머니'라 말하고 학교에서도 ‘성모교회(Holy Mother Church)’라 가르쳤지만, 내 눈에 교회는 ‘나쁜 년(bitch)’이었다."
밥의 교구는 빠르게 활력을 회복했지만 고위 사제들에게 그는 눈엣가시였다. 신도는 늘었지만 교회는 대교구가 전기요금을 대신 내줘야 할 만큼 더 가난해져갔다. 밥은 “우리가 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써야 하는지”, 또 어떻게 썼는지 설명하기 위해 툭하면 불려다녀야 했다. 보수의 백래시, 즉 요한 바오로2세와 베네딕토 16세로 이어진 '정통보수'의 반격으로 교회 창이 빠르게 닫혀가던 무렵이었다.
하지만 밥 신부는 이미 먼 영국에까지 꽤 알려진 명사였다. 그는 지역 라디오 방송 고정패널로, 또 인기 풍자 코미디언 겸 다큐 제작자 존 사프란(John Safran)의 토크쇼 공동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가히 대중적 컬트스타가 됐고, 트위터 팔로워도 12만 명이 넘었다.
교회 보수화에 비례해 그의 발언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2005년 사프란 토크쇼에서 그는 교회를 “사고를 억압하며 맹목적으로 복종할 때만 보상하는 경영 모델의 사업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모든 성자는 반역자였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면 그들(교회)은 당신을 내쫓으려 들 것이다. 반체제적인 이들을 포용할 줄 모르고, 그럴 마음도 없다. 나는 교회의 파시스트적 요소가 우려스럽다."
호주 가톨릭교회 수장 조지 펠(1941~2023) 추기경이 2017년 상습 아동성폭력 혐의로 기소됐다. 밥 신부는 펠의 혐의를 처음 공론화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2002년 한 신도가 수십 년 전 펠 신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사실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밥은 “교구 신부로서 진실을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자 “조지를 구하는 길"이라 여겼다. 펠은 멜버른과 시드니 대교구장 시절 사제 성추문을 은폐하고 돈으로 무마하는 데 앞장선 장본인으로, 밥 신부의 반교권주의적 사역을 ‘카페테리아 가톨릭(Cafeteria Catholics)’이라고 비꼰 적도 있었다. 밥 신부는 빅토리아주 의회 청문회에서 사제 성추문을 부정한 펠과 하트 대주교를 지목하며 “그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당을 팔아 이웃을 돕고 우리는 길거리에서 살겠다’고 말했어야 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펠 추기경은 2019년 2월 구속돼 8월 항소심에서 패했지만 2020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펠의 후임인 데니스 하트(Denis Hart) 멜버른 대주교는 2009년 만 75세를 앞둔 밥 신부에게, 73년의 종신 약속을 무시하고 은퇴를 종용했다. 교회법상 사제는 만 75세가 되면 교구장에게 사임서를 제출하고 주교는 여건을 고려해 수락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사제와 교구민의 의사가 규정보다 우선시되는 게 호주 교회 관행이라고 한다.
대주교의 명분은 ‘재정 부실’이었다. 밥 신부가 재임 중 교회 부동산 7채를 매각했고, 1998~2008년 사이에만 119만여 (호주)달러 적자를 냈다는 것. 밥 신부는 부임 초기에도 교회에는 돈이 없었고, 방송 출연료 등으로 번 돈 36만 달러도 교회 운영에 썼으며, 교회 빈 땅 일부를 주정부 주택사업 용지로 내줘 향후 150년간 개발이익이 교회에 지급되도록 했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부동산 매각은 모두 주교 승인을 받아 이뤄진 만큼 “만일 내게 죄가 있다면 그건 주교의 죄이기도 하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엄청난 자산을 갖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금”이라고 주장했다. 밥 신부는 2년여를 버티다 2012년 사실상 쫓겨났다.
그의 마지막 미사에는 평소보다 4배가 넘는 1,000여 명의 신도가 운집했다. 교구 의원이던 포트필립(Port Phillip) 시장 프랭크 오코너(Frank O’Connor)를 비롯한 신도들은 "밥 신부가 우리 곁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교회 바깥에서는 ‘맥파이’들이 찬송가 겸 풋볼 응원가 ‘다 함께 뭉쳐(side by side we stick together)’를 합창했다. 제대에 선 밥 신부는 “내겐 이제 교회가 없고 새로 갈 교회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시민들의 사제"라고 말했다. 이듬해 밥 신부의 생애와 은퇴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In Bob We Trust’가 제작-상연됐다. 다큐에서 그는 “교회가 현실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오직 성경을 해설해주는 존재로 전락했고 그게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며 "목구멍에 박힌 가시를 뽑고 다시 숨쉬기 위해 우리는 세속의 휴머니즘 속으로 더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퇴 직후 그는 ‘오픈 패밀리 재단’을 ‘밥 맥과이어 재단’으로 확대 개편해 숨지기 직전까지 이끌었다. 2022년 5월 한 인터뷰에서 그는 “모든 종교의 궁극적 메시지는 상식과 연민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어려운 주문도 적을 포함해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년을 행복하게 누리시라는 한 인터뷰이의 덕담에 그는 또 특유의 농담으로 “글쎄 내겐 마누라도 애인도 없는데…”라고 운을 뗀 뒤 “근년에 나를 미치게 한 아프리카인들의 말 ‘우분투(Ubuntu)’가 있네”라고 말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그 말처럼, 내겐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이 있어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여러분에겐 누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선종 한 달 전 병문안을 다녀온 사프란은 “언젠가 밥 신부에게 ‘어떻게 호감을 못 주는 이들에게도 늘 친절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누군가를 꼭 좋아해야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하더라”며 “밥 신부는 대중이 아는 것보다 훨씬 따듯하고 웃긴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89년 호주국가훈장을 받고 2001년 '올해의 빅토리아인'에 선정됐다. 그의 장례식은 그가 그렇게 못마땅해 하던 멜버른 성패트릭대성당에서 주정부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