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일러두기'가 있다면

입력
2023.05.10 04:30
22면
조경란 '일러두기' (문장웹진 5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한국일보에 실리는 여러 외부 연재물 가운데 '정우열의 회복'은 인기가 높은 편이다. 익명으로 솔직하게 털어놓은 고민에 대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상담해주는 구성이다. 구체적 사례는 다르지만 보편적인 인간 내면을 설명해주는 상담 내용 덕분에 독자들도 나와 내 주변을 더 이해하게 된다. 상담물의 인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다양한 방식의 길잡이를 독자들이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장웹진 5월호에 실린 조경란 작가의 '일러두기'를 읽고 나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지름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처를 그대로 안은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해한다면 깊은 상처를 주는 일 따위는 없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한편으론 이해의 노력은 언제 해도 늦지 않다는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소설이다.

오십을 눈앞에 둔 '재서'가 동년배인 '미용'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재서는 3년 전부터 아버지가 오래 운영해온 인쇄·복사 전문점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다. 길 건너 우엉 전문 반찬 가게 사장인 미용은 "자신의 감정을 한사코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듯한 사람"이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산다는 이유로 나이 지긋한 주변 상인들에게 "석연찮은 여자"로 여겨졌으나 재서는 은근히 그를 신경쓴다.

미용에게 묘한 관심이 생긴 건 우연히 그녀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아이를 넷이나 낳아 막내딸에게 더 냉랭했던 부모.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선이었던 아이. 중년이 되어서는 "자기 자신만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 일기 같은 원고 속 미용에게서 재서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늘 문제와 오해가 있어" 왔던 그는 3년 전 아내에게 갑자기 "버려진" 이후 직장에 나가지 못했다. 삭은 장롱이 쓰러져 자신을 덮치는 사고를 겪기 전까지 죽은 듯 시간만 보낸 재서다.

변화는 미용에게 먼저 찾아왔다. 트라우마를 남긴 고등학교 시절의 폭력 교련 선생을 찾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 그 교사를 실제 만났는지보다는 미용이 며칠간 가게 문도 닫고 '교련시간'이란 제목의 글을 써낸 게 중요하다. 자신을 오롯이 마주하게 된, 치유의 시간이라서다.

이후 미용이 검은 복면을 쓴 장면은 심리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텔레비전에서 복면을 쓴 여자가 아이들을 구출한 장면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 산 물건이다. 그 순간 미용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상처 많은 어린 미용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리라. 더는 자신만을 죽이거나 숨죽여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을 때 주의점을 미리 알려주는 '일러두기'에 대해 미용은 이렇게 말한다. 불친절한 게 인생이라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한 번쯤 나 혹은 당신에 대한 '일러두기'를 직접 작성해보고 싶어진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진달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