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미안해, 한순간도 널 잊고 산 날이 없었어" 입양보낸 딸 찾는 이복임씨

입력
2023.05.07 07:00
1986년 용산 조산소에서 입양 보내
"돈 없어서 아이 보냈다" 평생의 한
1970년 가족 잃고 입양된 김미옥씨
"엄마에게 '잘 자랐다'고 말해주고 싶어"

어린이날·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 되면, 특히 더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전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아이를 입양 보내야 했던 부모와 성인으로 성장한 이후 친부모를 찾는 자녀들이다. 입양을 장려한 반면, 친가족 정보를 정확히 기록해 두지 않던 과거 관행 탓에 이들이 친가족을 찾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해외입양 관련 단체 등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된 이들은 22만여 명으로 추산된 가운데 자녀를 찾고자 경찰청에 유전자를 등록한 부모는 4,472명(지난 2월 기준)이다. 입양의 날(5월 11일)을 앞두고 친어머니를 찾으러 한국에 온 김미옥(57·미국명 미오카 밀러)씨와 1986년에 입양 보냈던 딸을 찾고 있는 이복임(61)씨의 사연을 들어봤다.



'독쟁이'에 살았던 엄마와 여동생을 찾습니다

미옥씨는 여섯 살(추정) 때인 1974년 미국으로 입양됐다. 미옥씨의 입양 당시 나이가 '추정'인 이유는, 정확한 생년월일을 알 수 없어서다. '김미옥'이라는 이름도 진짜인지 불분명하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수용자 신상카드에는 1966년 1월 1일생, 김미옥, 미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시립보호소 기록에 따르면, 미옥씨가 살던 곳은 '독쟁이(인천 용현동)'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살다 서울로 이사 왔다. 1970년 5월 미옥씨가 발견된 곳은 서울 성동구 왕십리동이었다. 가족이 기억할 만한 단서로는 미옥씨 오른쪽 다리에 크게 덴 상처가 있다. 미옥씨는 "시장에 갔다가 끓는 물에 오른쪽 다리 전체를 덴 기억이 있다"고 했다.


미옥씨가 보호소에 가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아이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때렸고, 어머니는 도망쳤다고 한다"고 적혀 있었다. 성격에 대한 묘사도 있었는데 "항상 예쁘게 하고 있기를 원하며 긴 머리를 절대 자르지 못하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자르고 싶어하지 않았던 긴 머리는 보호소 입소 후엔 자른 듯 수용자 카드에는 짧은 단발머리 사진이 담겼다. "커서 간호원이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야무져서 누가 잘못하면 꼭 따지고, 명랑하고 수선스럽다가도 가끔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1971년 모의보육원(현 애향원)으로 옮겨진 미옥씨는 1974년 "친자녀 또래와 비슷한, 나이가 좀 많은 어린이를 원한다"는 미국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입양 직전 미옥씨에 대해선 "외국에 갈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이후 삶은 미옥씨의 기대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미옥씨는 늘 엄마를 그리워하며 자랐다. 가정을 이루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마음속 허전함은 더 커졌다. 아들을 낳아 엄마가 되고 나니 친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졌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미옥씨는 지난달 5일, 아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서울경찰청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최면수사를 통해 미옥씨의 가족찾기에 도움을 주기로 해서다. 당시 어린 미옥씨가 독쟁이라는 지명을 알고 보호소 직원에게 말해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최면수사를 통하면 잊고 있었던 다른 단서가 나타날 수 있을 터였다. '송주', '한긍' 또는 '한성'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그 이상은 진전이 없었다.

미옥씨는 엄마를 만나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저 잘 자랐어요"라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성장 과정은 힘들었지만, 자신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을 엄마를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미옥씨는 용현동, 보호소 등을 돌아본 후, 가족을 찾지 못한 채 지난달 26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혹시 이 기사를 볼 수 있을 있을지도 모를 엄마와 동생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평생 엄마와 여동생을 생각해 왔고 그리워해 왔습니다. 아들이 태어났던 날, 생일, 가족행사 등 모든 특별한 순간마다 더 그리웠어요. 저를 떠나보내고선 늘 마음 아파하셨을 것 같아요. 만나게 된다면 엄마를 꼭 안아드리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회하고 싶습니다."


후암동 조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1986년생 딸을 찾습니다

이복임(61)씨는 1986년 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조 산부인과(조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운영하던 조산소)에서 막내를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입양 보냈다. 쌍꺼풀이 또렷한 여자아이였다. 복임씨 부부는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서 크면 적어도 '밥은 배부르게 먹고살지 않겠냐'는 말에 입양 보내기로 결심했다. 단칸 옥탑방에서 연년생 두 남매 포함 네 식구가 살았는데, 복임씨 혼자 재봉틀질로 번 수입으로 겨우 먹고살았을 정도로 살림이 빠듯하던 때였다.

복임씨는 "만약 아이가 친부모 이름을 알고 있다면 아빠는 박종철, 엄마는 우난희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산원에서 소개한 집으로 보낸 터라, 입양기관을 통하지 않았던 만큼 따로 입양 서류는 작성하지 않았고, 그저 아이를 감싼 포대기 속에 아빠의 신분증과 언니 친구의 신분증을 복사해 접어 넣었다고 했다.

복임씨는 아이를 떠나보낸 그날부터 다시 재봉틀을 잡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 바늘이 손을 찌르는 줄도 몰랐지만, 아이를 다시 찾아오려면 돈을 많이 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혹시 구박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거나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데리고 살았으면 딸이 더 힘들었겠지" 하며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꼭 내가 죽을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아이를 떠나보냈던 후암동에 가서 멍하니 서 있던 때도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산원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고, 조산소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생일 등 가족 모임 때마다 "여기 한 자리가 더 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첫째와 둘째가 학교에 입학할 때,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 결혼을 할 때, 손주들이 태어났을 때마다 막내가 떠올랐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웃음 지을 때에도 "우리 딸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행복해선 안 된다"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몰아세웠다고 했다.

복임씨는 지난 2021년 11월 한국일보에 게재된 한 해외 입양인에 대한 기사(1985년 방화동 '김순감 조산소'에서 태어난 딸이 엄마를 찾습니다)를 보고 "내 딸 같다"면서 본보로 전화를 걸어왔다. 복임씨는 생면부지인 기자와의 첫 통화였건만, 눈물부터 꺼이꺼이 쏟아냈다. 복임씨는 "돈 때문에 막내를 보냈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일했고, 과일 경매 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한 지난 2010년부터 갖은 수단을 동원해 딸을 찾았지만 찾지 못하자 그 후로는 입양인이 나온 방송이며 신문기사를 볼 때마다 혹시 내 딸인가 싶어서 무작정 전화를 걸곤 한다고 했다.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지만 기사에 나왔던 입양인과 친자 관계가 아니었다.

복임씨는 이제는 서른여덟, 어쩌면 아이 엄마가 됐을지도 모를 막내딸을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는 평생 그리워하던 딸을 만나면 함께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다른 거 없어요. 지금부터라도 같이 살고 싶어요. 만약 딸이 나를 만나기 싫어한다면 그것도 괜찮아요. 다만 우리 애기가 고생 많이 했잖아요.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고, 한순간도 너를 잊고 산 날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동안 못 해줬던 것들을 내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다 해주고 싶습니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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